컨텐츠 바로가기

06.17 (월)

[ESC] 거친 어머니의 계란찜, 그리워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라이프 레시피] 박찬일의 안주가 뭐라고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겨레

예전에 나는 이렇게 썼다.

‘어머니가 연탄 부뚜막에서 계란찜을 만드는 아침은 행복했다. 계란찜 ‘스뎅’ 그릇이 밥솥 뚜껑과 마찰하며 내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이제는 다시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옛날 부엌은 화구가 별로 없었다. 방이 두 개였으니, 연탄 화덕도 두 개. 어머니에게는 비상으로 석유풍로가 하나 있었지만, 기름을 아껴야 했다.(이스라엘과 중동이 전쟁을 벌이던 때였다. 석윳값이 금값이었다.) 바쁜 아침에 밥과 반찬을 동시에 해야 했고, 어머니들은 으레 밥솥에 뭔가를 같이 쪄냈다. 시간과 에너지를 아끼는 묘수였다. 요리사들이야, 계란찜을 한다면 큰 볼에 계란을 풀고 거품기로 충분히 저어서 멍울이 다 풀리어 혀에 부드럽게 감돌게 만든다.

옛날 어머니들에게 거품기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스테인리스 그릇이나 사발에 넣고 수저로 저으니 원래 껍질 속에 같이 있었으나 태생이 다른 흰자와 노른자가 싫다고 따로 놀았다. 섞인 듯했지만 섞이지 않았다. 군데군데 선명한 노란색과 흰색이 계란의 본능대로 드러났다.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았다. 거칠게 씹히는 질감이 살아서, 본디 유순하고 얌전하며 튀지 않는 계란의 속성에 약간의 반항기를 준 셈이었다. 밥을 먹다 보면 으레 어머니에게 눈치 없이 투정 아닌 보고를 하게 되어 있다. “엄마, 계란이 잘 안 섞였어.” 이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이라는 걸, 우리는 어려서 다 배웠으리라.

“그냥 먹어!”

거품기의 존재도 몰랐을, 있더라도 컴컴한 옛 재래식 부엌에서 어머니가 넓은 볼에 계란을 우아하게 깨뜨려 넣고 그걸 휘휘 젓고 있었을까. 먹고살기 위해 매일매일 투쟁이었을 어머니의 마음을 우리는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먹었고, 그게 이제는 목에 걸린다. 혀에 남는다. 그래, 보드라운 계란찜보다 그렇게 막 섞인 게 더 낫지! 계란찜이 좀 거칠어야 진짜지! 멋대로 최면을 건다. 추억은 원래 미화되게 마련이니까.

그때 어머니는 계란찜에 무슨 양념을 했을까. 그저 파나 썰어 넣고 소금을 뿌리는 게 전부였을 것이다. 아 참, 고춧가루를 휙 한 숟갈 얹었다. 그건 아버지의 기호를 고려한 것일 텐데, 그렇게 먹다 보니 이제는 순정한(?) 계란찜보다 거칠고 고춧가루 뿌려 매운 놈이 좋다. 파도 막 썰어 올리고, 더러 후춧가루도 뿌리고.

계란 젓기를 대충 하면 조직도 거칠지만, 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어머니가 풀어 넣은 소금이 채 녹지 않았던 거다. 계란은 수분이 많지만, 물로 보지 말라. 지방도 단백질도 있다. 충분히 저어주지 않으면 반드시 복수한다. 소금이 바닥에 깔린다. 먹다 보면 그릇 바닥에 남는 것들은 엄청나게 짜다. 다행스러운 건 인간의 미각은 반드시 적응한다. 계란이 잘 안 풀려서 거친 것조차 우리가 사랑하게 되듯, 마지막 계란찜을 긁을 때 올라오는 짠맛에도 맛을 들인다. 밥을 비벼 먹든 최후의 소주잔을 털어 넣을 때든 진가를 발휘한다. 그런 그냥 짠 계란찜 찌꺼기가 아니다. 계란의 맛을 가진 소금이 된다. 소금 몇 톨로 안주도 하는데!

사실, 소금도 고루 풀려 있고 아이스크림처럼 살살 녹는 계란찜을 하자면 물을 많이 넣으면 된다. 일본식은 물 7에 계란3 정도 하기도 한다. 감칠맛을 내기 위해 ‘다시’를 쓴다. 별 팁도 아니지만, 이렇게 섞고 트러플오일을 좀 떨어뜨리면 꽤 그럴싸한 안주가 되기도 한다. 아예 트러플(송로버섯)을 다져 넣을 수도 있다.

나는 어떤 술집이든 계란찜이 안주판에 적혀 있는 집이 반갑다. 돈도 안 되고, 은근히 귀찮고, 배도 불러서 매상도 떨어질 텐데. 한술 더 떠서 공짜로 주는 집도 있다. 옛날 호시절 강남에서 술을 푸다가 속칭 청담동 텐트바에서 3차, 4차를 하던 때가 있었다. 꼭 한 잔 더 마셔야한다기보다 그놈의 텐트바가 거기 있으니 결국 한 잔 더 먹게 되는 구조였다. 세상 싼 재료가 계란이니 일곱, 여덟개쯤 깨뜨려 넣고 무성의하게 끓인 계란찜 뚝배기를 한 2만원쯤 받았다. 에이, 망할 놈들아.

나는 여전히 계란찜은 중탕으로 해야 맛이라고 생각하지만, 뚝배기도 나쁘지 않았다. 고속버스터미널 맞은편 상가 지하에는 맛집이 은근히 좀 있다. 동네가 동네인지라 술 마실 데가 참 드문데, 이 낡은 상가의 지하에는 나름 단골도 거느린 맛집이 있다. 그중 하나가 ‘옹달샘’이었는데, ‘뿌우뿌우~’ 하고 증기를 뱉는 기관차 같은 계란찜으로 유명했다. 이른바 화산 계란찜을 처음 본 게 그 집이었다. 주로 고기를 팔았고, 계란찜은 사이드였다. 유명한 여자 골프선수 부모가 경영하는 집이어서 온통 가게 안에 그 선수의 사진이 도배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그 선수 어머니란 걸 알 수 있는 용모의 주인아주머니에게 계란찜을 공짜로 얻어먹는 법이 있었다.

“아휴, 저 선수 팬이에요. 지난번 우승 축하드려요. 마지막 퍼팅할 때 드라이버질을 얼마나 잘하시던지!”

나는 골프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박찬일(요리사 겸 음식칼럼니스트)

한겨레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언론, 한겨레 구독하세요!
▶네이버 뉴스판 한겨레21 구독▶2005년 이전 <한겨레> 기사 보기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