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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삶과문화] 콜럼버스, 레닌,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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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에 환호 보냈던 대중들 / 이젠 의심의 눈초리로 응시 / 새로운 미래 꿈꾸기 위해선 / 영웅들 재평가서 출발해야

미국 백인 경찰의 과잉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사건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새로운 시대 선언으로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반인종차별 시위가 미국을 넘어 유럽으로 확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구호 BLM(Black Lives Matter) 역시 거시적 당위의 차원에 그치지 않고 일상생활의 미시적인 영역에서도 다양한 변화를 초래하고 있는 모양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일부 시위대가 약탈이나 유혈폭동의 조짐을 보이고 이를 막기 위해 공권력이 출동하는 등 그간의 문제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지만, 이전과 달리 이번 사건은 좀 더 광범위한 대중적 합의와 공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이런 느낌을 받게 된 이유를 들라면 나로선 ‘어떤 이미지’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의 버드 공원에 있던 콜럼버스 동상이 인근 호수에 버려진 모습, 또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 있는 콜럼버스 공원의 콜럼버스 동상이 목이 떨어진 채 서 있는 모습. 콜럼버스가 누구인가. 아메리카의 발견자, 소위 미국의 기원이 아닌가. 그런 자의 동상이 호수에 처박히고 목이 떨어진 채 서 있는 모습은 비록 보도사진을 통한 것이긴 하나 충격적인 것이 사실이다.

세계일보

신수정 명지대 교수 문학평론가


돌이켜보면 이런 충격이 처음 같지는 않다. 1991년 소비에트의 해체와 더불어 레닌의 동상이 시위대에 의해 바닥으로 끌어내려지던 모습 역시 잊을 수 없는 역사적 장면 가운데 하나다. 198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광주를 짓밟고 탄생한 정권이 그의 이름을 금지하고 검열을 강화하면 할수록 그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배가되던 당대의 역설적인 움직임을 지금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자리에서 새삼 그에 대한 찬미를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어느덧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어버린 그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고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이전에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 전혀 다른 측면에서 그를 비판할 부분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다만 나는 어떤 세대에게 그의 동상이 밧줄에 묶여 추락하던 모습이 초래한 충격에 대해서 말하고 싶기는 하다. 그리고 그것이 감성적으로 한 세계의 붕괴에 버금갔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그러했다는 점에 대해서도.

콜럼버스의 동상에 대한 각하의 움직임은 이제 인종차별과 연관이 있다고 지목된 미국 역대 대통령의 동상에 대한 철거 요구로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최근의 보도에 따르면, 수도 워싱턴의 링컨 파크에 있는 링컨의 동상과 뉴욕 자연사박물관의 입구를 80년 동안 장식해온 루스벨트 대통령의 기마상 역시 반인종차별주의 시위대의 요구를 비껴가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팔을 벌리고 있는 링컨 대통령 앞에 흑인 남성이 무릎을 꿇고 있는 링컨 동상이나 말을 탄 루스벨트 대통령을 아프리카계 흑인과 미국 원주민 인디언 등이 호위하고 있는 듯한 루스벨트 기마상이 인종차별적 시선을 내포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것이 한 세계의 종말을 암시하는 징후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이제까지 미국의 영웅들로 추앙되던 인물들의 행적과 그들을 기리던 가치관이 이제 더 유효하지 않다는 것, 위대한 미국은 그들의 존재로 뒷받침되지 않는다는 것,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미래를 꿈꾸기 위해선 그들에 대한 재평가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는 것, 반인종차별주의 시위대의 동상 철거 행위와 요구는 바로 이러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 아닐까.

지난해 12월 군사반란 40주년을 맞아 서울 광화문광장에 설치됐다가 2주 만에 시민들의 손에 의해 파손된 뒤 광주 옛 전남도청 앞으로 옮겨진 전두환 동상이 그의 구속을 요구하는 광주시민들에 의해 또다시 부서진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는 사진을 보고 난 소회 역시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 세계가 무너져 가고 있다는 것. 동상들의 주인공이 활약하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것. 그들에게 아낌없는 환호를 보내던 대중은 이제 그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응시하고 있다는 것. 미래는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신수정 명지대 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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