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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김미월의쉼표] 우리가 다 같이 나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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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동네 카페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창가 쪽이 소란스러웠다. 돌아보니 젊은 남자가 교복차림의 여고생들과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초상권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고생들이 카페 곳곳을 휴대폰 카메라로 찍었는데, 자신도 찍혔다고 판단한 남자가 사진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고, 학생들이 그것을 거부하는 상황이었다. 초상권은 마땅히 지켜져야 한다, 나도 원치 않는 사진에 찍히는 건 싫다, 하고 생각하는데 문득 오래전 후배와의 일화가 떠올랐다.

후배는 고아로 자랐다. 이십대 후반에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상식 날 그는 없는 가족 대신 친구들을 불렀다. 시상식장은 시끌벅적하고 화기애애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웃고 떠들고 사진을 찍었다. 일주일 후, 후배가 시상식에 와준 이들에게 한턱내겠다고 해서 그의 자취방으로 갔다. 다섯 명이 앉으면 꽉 차는 좁은 방 한복판에 배보다 큰 배꼽처럼 황당하리만치 커다란 액자가 놓여 있었다. 시상식 사진이었다. 꽃다발을 안은 후배를 둘러싸고 박수치는 사람들 속에 나도 있었다. 언제 이렇게 사진을 인화하고 액자까지 준비했느냐고 묻자 그가 손사래를 치며 입을 열었다.

전날 저녁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가 그를 불러냈단다. 집 근처 시장통으로 나갔더니 길바닥에 이젤 네 개가 늘어서 있더란다. 이젤에 놓인 것은 언제 찍혔는지도 모를 그의 시상식 사진들. 행인들이 전시회 관람하듯 사진을 흘깃거리며 지나갔다. 사진 한 장에 십만원! 전화로 그를 불러낸 사진사가 콩나물 한 단에 천원! 하듯이 외쳤다. 시상식장의 정신없는 분위기를 틈타 수상자 동의 없이 사진을 찍은 후 나중에 수상자에게 강매하는, 이른바 시상식 전문 사진꾼이었다. 그 작태도 불쾌하거니와 사진값도 터무니없었다. 십만원이면 한 달 방세인데. 후배는 화를 내며 돌아섰다. 그러나 서너 걸음 걷다 멈추었다. 사진 속 그와 친구들의 얼굴이 눈에 밟혔다. 자신이 그 추운 시장통 길바닥에 그들을 버리고 가는 것 같았다. 결국 되돌아섰다. 고심 끝에 한 장 고른 것이 바로 이 사진이라고 후배는 말했다.

초상권 침해로 신고했어야 한다고 우리 중 누군가 잔소리를 했다. 맞아. 그러게. 다들 한마디씩 거들었다. 후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래도 그 사람 덕에 우리가 다 같이 나온 사진을 갖게 됐잖아. 이렇게 큰 사진이 집에 있으니 혼자 있어도 혼자가 아닌 것 같고 좋더라. 우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미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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