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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장석주의인문정원] 이제 ‘아메리칸 드림’은 개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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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美 이민은 脫디스토피아 / ‘20 vs 80 사회’로 빈부격차 심화

미국 이민을 간 친구가 오랜만에 돌아와서 만났다. 그는 늙고 지쳐 보였다. 그 피로감의 정체는 모호했다. 어쨌든 마흔 해 전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 기회와 평등의 신세계로 향하던 이민행렬은 ‘불량국가 탈출’과 ‘자기 삶의 개조’라는 이중 프로젝트에 의해 추동되었다. 이민자들은 세탁소, 소규모 자영업자, 청소용역, 부동산업 등 진입장벽이 낮은 일자리를 찾아 일했다. 각자도생의 환경에 내던져진 이민자들이 겪은 수난과 애환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다 헤아릴 길은 없다.

이민자는 이방인, 주변인, 디아스포라다. 다른 곳에서 와서 거처를 정한 사람, 미래를 담보로 현재라는 불확실성을 받아들인 사람들. 절박감에 떠밀려 출발하지만 도착은 유예되는 사람들. 이민자는 출발지와 도착지, 그 두 장소 ‘사이’에서 방황한다. 바깥과 안을 동시에 품은 접속지대이자 상호작용의 매개공간인 ‘사이’에서 방향전환의 자유가 주어지지만 이민자는 매개공간에 묶이고, 영혼은 두 조국 ‘사이’에서 정처를 잃은 채 떠돈다.

세계일보

장석주 시인 인문저술가


애초 미국은 종교 자유와 경제 회생을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온 유럽 이민자의 나라였다. 미국 경제가 황금기를 누리던 시절이 있었다. 1960년대만 해도 미국은 청교도적인 청렴과 근면을 미덕으로 섬기는 사회, ‘이상적인 계층 이동성’의 사회, 사회적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진다는 믿음이 있었다. 인종, 젠더, 계급으로 인한 기회의 불평등 없이 능력 본위로 경쟁을 하면서 계층의 상향이동이 이루어지는 ‘아메리카’는 ‘유토피아’의 다른 말이고, 미국 이민은 곧 디스토피아에서의 탈출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미국의 경제 사정이 호황이던 시절에도 인구 중에서 15퍼센트는 가난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리처드 리브스는 ‘20 VS 80의 사회’에서 “미국은 빈곤이 끈질기게 사라지지 않는 나라이면서 극단적인 부자들이 존재하는 나라”라고 말한다. 과잉소비로 포장된 ‘잘 사는 나라’라는 착시가 있었을 뿐 내부에는 경제 불평등과 소득 격차가 여전했다. 동등한 계층 간에 결혼하는 ‘동류 짝짓기 assortative mating’로 상위 20퍼센트와 하위 80퍼센트 간의 소득격차는 재생산된다. 결혼이 위험과 자원을 분산하고 공유하는 기능을 작동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계층 간에 벌어진 ‘자녀의 풍성한 경험을 위한 지출’의 격차는 학력과 소득의 격차, 직업 안정성의 격차, 인지 역량의 격차로 이어진다. 미국 내 견고한 계급 간 격차는 이 나라가 이상적인 계층 이동성 사다리를 가진 유토피아가 아니라는 자명한 증거다.

21세기로 넘어오면서 미국의 세계 지배는 덧없이 끝났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도, 달러 경제의 위력도, 실리콘밸리의 신화도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남은 것은 백인 중심의 속화된 자본주의국가의 나르시시즘뿐이다. 20세기 말 장 보드리야르는 이미 아메리카를 마치 불가능을 실현한 것처럼 보이는 극실재(hyperrealite)의 나라라고 언명했다. 이 모조 천국은 심각한 무역적자에 시달리고, 실직자는 넘쳐나며, 경제는 하방압력을 받으며 쇠락한 제국이다.

계층 간 소득 대격차(Great Divide)는 ‘아메리칸 드림’이 물질성에 가려진 허상임을 폭로한다. 미국의 자랑거리는 고작 ‘가짜 낙원’인 디즈니랜드와 ‘카지노 자본주의’의 상징인 라스베이거스 호텔들의 번쩍이는 야간조명뿐이다. 미국인의 집단 무의식에 들어선 불안과 기괴한 피해의식은 미국의 새로운 정체성이 되었다. 자국 이익 중심주의는 이런 무의식적 트라우마의 발현이다. 그곳이 어디든 능력 본위가 아니라 부모의 부와 교육 계급 같은 상징자본에 의해 자식의 계급이 고착화되고, 기회 사재기가 용인되며, 계층 간 이동 사다리가 사라진 사회에서 ‘아메리카 드림’은 한낱 개꿈일 것이다.

장석주 시인 인문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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