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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관변단체 50년 오명 벗고, 진정한 ‘마을공동체 운동’ 되살린다 [커버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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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현대화 등 ‘큰 족적’ 남겼지만 전경환이 실권 잡으며 변질…“새마을 이전부터 농촌운동 존재, 지역주민이 주인공인 정책들 끊임없이 나올 것”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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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오후 경기 이천의 자택에서 만난 이재영씨는 1972년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새마을운동에 공이 많다”며 훈장을 받았던 사연을 직접 들려주었다. 전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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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 공로’ 국민훈장 받았던 이재영씨

“내가 한 건 새마을운동 아닌
순수한 농촌·협동조합 운동
청춘 바쳤던 운동의 순수성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길”

1972년 3월 전국 극장에서 상영된 <대한뉴스> 제870호에는 ‘땀 흘린 보람’이라는 1분41초 분량의 흑백 영상이 담겼다. 그해 3월6일 경제기획원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월간 경제동향을 보고받은 뒤 긴장된 표정을 한 다부진 청년에게 직접 훈장을 달아주고 있었다. “새마을운동에 공이 많은 경기도 이천 농업협동조합 장호원지소 이재영씨에게 국민훈장을 달아주었습니다. 이씨는 지난 1963년 농협 개척원으로 농촌에 투신한 이래 지역 자립농가 육성에 정열을 불태웠습니다.”

이씨는 농촌 운동가로서 자신의 활동 내역과 경험담을 박 전 대통령에게 들려줄 기회를 우연찮게 얻었다. 당시 내무부에서 새마을운동 지도자들을 추천해 대통령에게 보고하자, 농림부에서도 존재감을 나타내기 위해 농촌 활동가들을 추천하면서 이씨가 대통령 앞에 서게 됐다. 박 전 대통령은 이씨의 경험담에 감동해 새마을운동과 농촌운동의 차이점 등을 물었다고 했다. 갈비탕을 놓고 마주 앉은 점심 자리에서 대통령은 ‘청와대에 새마을담당관실을 만들 건데 이를 맡아달라’고 이씨에게 제안하기도 했다.(이씨는 거절하고 다른 이를 추천했다.)

지난달 29일 경기 이천의 자택에서 만난 이재영씨(84)는 지난 일들이 “영화 필름 보듯이 생생하다”고 했다. 몇 해 전 뇌경색으로 쓰러진 이씨는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에 의존한 채 생활하고 있다. 시력도 대부분을 잃었다. 자주 눈을 감은 채 이야기하던 그는 인터뷰를 마친 뒤에는 “다음에 만나면 얼굴을 못 알아 볼 텐데 어쩌지”라며 걱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반세기도 더 전의 일은 또렷하게 기억했다.

이씨는 1972년 박 전 대통령에게 훈장을 받은 자생적 새마을운동 지도자 7명과 함께 대만과 일본의 농촌을 돌아보는 현지 탐방을 떠나기도 했다. 전국 각지에서 나름의 방법으로 마을의 소득 증대를 이끈 인물들이었다. 이씨는 “훌륭한 사람들이었고 훈장을 받을 만한 사람들이었다”고 기억했다. 1973년 나온 <새마을로 가는 길- 제2집>에 이들의 수기가 남아있다. (이들은 대부분 현재 세상을 떠났거나 요양원 등에서 머물고 있다. 인터뷰를 위해 접촉했지만 대부분 고령으로 대화를 나누기 힘들다고 했다.)

1970년대 이전에도 각종 지역개발 사업이 이뤄졌다. 개발 사업의 목적은 국가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었기에 발전의 방향과 목적이 국가 주도로 결정됐다. 부락과 마을이 개발을 위한 기본 단위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1년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뒤 이러한 지역개발을 이어갔다. 1969년 8월 경북 청도군 청도읍 신도1리의 수해 복구 현장을 순시하던 박 전 대통령은 이 마을이 자발적으로 발전해온 모습을 발견했다. 이곳이 ‘새마을운동 발상지’로 소개되게 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새마을’이란 용어는 1970년 4월22일 박 전 대통령의 가뭄대책 지방장관 회의 연설 중 처음 언급됐다.(이날은 2011년부터 법정 기념일인 ‘새마을의날’로 지정됐다.) 1971년 정부가 전국 3만3267개 행정 리·동에 시멘트 335포대씩을 지원한 것이 새마을운동의 첫 사업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지원받은 시멘트는 길을 만들고 마을회관을 짓는 등 농촌을 현대화하는 데 사용됐다. 이후 이씨와 같은 이들이 새마을운동의 지도자로 홍보에 활용됐다.

이씨는 당시 ‘새마을운동에 공이 많은 인물’ ‘국민포장을 받은 새마을운동의 기수’로 묘사된 것에 “별로 좋지 않았다”고 했다. “새마을운동이 아니고 순수하게 농촌운동, 협동조합운동을 한 것인데, 새마을운동을 훌륭하게 한 지도자로 둔갑됐다”고 했다. 그는 인터뷰 내내 ‘새마을운동의 기수’와는 거리가 멀다며 한사코 선을 그었다. “자신의 농촌운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되길 원치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청춘을 바친 농촌운동의 순수성이 이용되지 않았으면 한다는 그는 “박 전 대통령의 제안을 거절한 걸 가장 잘한 결정”이라고 말했다. 당시 전국적으로 진행된 새마을운동에 대해 그는 “농촌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은 인정하지만, 순수한 농촌운동이라고 보진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국민운동에서 사조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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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은 1970년대 마을의 도로를 정비하는 등 농촌 현대화 작업에 중점을 두다가, 1990년대 들어서 정부정책에 발맞춘 캠페인 활동을 벌이고, 2007년 태안 기름유출 사고 등 각종 현장에서 봉사활동을 벌이는 형태로 지속돼왔다. 새마을운동중앙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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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가 새마을운동과 관계를 끊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박 전 대통령 사망 직후 대통령경호실장 등을 지낸 전경환씨(전직 대통령 전두환씨의 동생)가 새마을운동의 실권을 잡게 되면서다. 새마을지도자 연수에 강사로 나섰는데 수료증에 당시 연수원장이자 오랜 기간 새마을운동에 헌신한 김준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장이 아닌 전씨의 이름이 새겨져 발급된 것이다. 지역에서도 전씨와 잘 안다며 줄을 서는 이들이 등장했다. 이에 염증을 느껴 이씨는 새마을운동과 거리를 뒀다고 했다.

박 전 대통령 사망 사건은 새마을운동이 동력을 잃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지만, 국민적인 불신의 대상으로 존재감이 축소된 데에는 1988년부터 드러난 전씨의 비리가 결정적이었다. 전씨는 1981년 새마을운동협회 중앙본부의 사무총장을 맡았고, 1985년부터는 새마을운동협회 중앙본부 회장, 1987년부터 새마을운동 중앙협회 중앙본부 명예회장 겸 명예총재 등을 맡았다. 7년 동안 새마을운동 조직은 전씨의 사조직처럼 여겨졌다.

1988년 3월21일 중앙일보는 국회의원이 되지 못했던 전씨가 “81년 1월 느닷없이 민간주도 새마을운동 실질적인 ‘총책’으로 발탁돼 부임했다”며 “전씨의 전격적인 사무총장 취임은 새마을운동그룹의 입장에서는 ‘점령군의 진주’ 같은 충격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고 평가했다. 또 “99% 새마을과 무관한 이들이 중앙본부 조직을 장악하면서 본부 분위기와 새마을운동의 방향은 어느 새 변질됐다”며 “80년 이후 새마을운동은 ‘민간주도’가 아니라 ‘군 주도’였으며 중앙본부는 새마을운동본부라기보다 전경환사업본부였다고 비판한다”고 전했다.

‘실세 중 실세’인 전씨가 여기에 손을 뻗친 건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인 조직망을 지녔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도 새마을운동 조직을 통해 전국에 자신의 정책 방향을 알리며 농촌 지역의 지지 기반을 다져왔다. 대통령의 동생이자 최측근인 전씨는 이를 통해 자신의 이권도 챙기고 정치적 영향력도 발휘할 수 있었다.

전씨의 전횡이 가장 잘 드러났던 사건 중 하나가 ‘소값 파동’이다. 1980년대 초·중반 송아지를 수입해 길러 파는 일이 큰 이권 사업으로 꼽혔다. 전씨는 새마을지도자에게 송아지 분양 혜택을 주겠다며 농림수산부에 압력을 넣었고, 그 결과 당초 5만마리였던 소 수입 계획은 7만4000마리로 늘어났다. 이후 치솟던 소값이 폭락했다. 수입된 소 중엔 병든 소도 있었다. 이후 각종 비리로 결국 검찰 수사를 받게 된 전씨는 73억원가량을 횡령한 것으로 드러났고, 1988년 새마을신문사 관련 탈세 혐의와 각종 이권개입 등 7가지 죄목으로 기소돼 이듬해 징역 7년 벌금 22억원, 추징금 9억원이 확정됐다.

전씨의 비리가 드러난 이후 새마을운동은 힘을 잃었다. 1970년대 농촌운동, 1980년대 관변단체로 대변되던 새마을운동의 성격은 1990년대 들어 봉사활동 단체로 바뀌었다. 1997년 금융위기에는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했고, 2007년 태안기름유출 사고가 터지자 봉사활동에 손을 보탰다. 독거노인 돕기, 김장나누기 등 지역에서도 다양한 봉사활동을 해왔다. 하지만 과거와 같은 영향력은 발휘하지 못했고, 국민적인 공감대도 얻지 못했다.

대신 새마을운동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이들에겐 성배와 같은 역할을 했다. 2011년에는 영남대학교에 박정희새마을대학원이 개원했다. 새마을운동 발상지임을 주장하는 지역에 각종 기념관이 들어섰다.

■새마을운동,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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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김영미 국민대 한국역사학과 교수는 “새마을운동이 있기 전에 새 마을과 새 농민이 있었다”고 했다. 김 교수는 2009년에 낸 책 <그들의 새마을운동>에서 이미 이재영씨의 사례를 소개했다. 이씨처럼 박 전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을 부르짖기 앞서 농촌에서 자생적으로 움직인 이들이 있었다. 농촌운동, 협동조합운동, 협동농장운동 등 다양한 움직임이 이미 존재했다.

새마을운동이 한국 현대사에서 지울 수 없는 큰 족적을 남긴 것은 분명하다. 가장 집중적으로 이뤄진 1970년대는 ‘새마을운동의 시대’라고도 불린다. 새마을운동 사업은 마을을 기본 단위로 해 발전 단계에 따라 3가지 등급으로 나눈다. 가장 낮은 기초마을부터 자조마을, 자립마을로 불린다. 자립마을은 명실상부한 ‘새마을’이 된 곳을 가리킨다. 1970년대에 집중적으로 이뤄진 새마을운동의 결과를 관측하려면 이 자립마을의 수치를 확인하면 된다. 당시 내무부 자료에 따르면, 1972년 전국의 3만3267개 마을 중 자립마을은 7%였는데, 1979년 97%로 증가했다.

전국의 마을이 참여했고, 1978년 기준 1주일 이상 새마을연수원에서 합숙하며 교육을 받은 지도자들의 숫자가 3만4760명에 달했다는 당시 내무부 통계도 나온다. 새마을운동이 국가 주도로 이뤄진 동원 운동이었지만 강제성만으론 설명되지 않는 숫자다. 당시 주민들은 사비를 털어 마을 개선에 동참하기도 했다.

여성의 지위상승이라는 의외의 효과도 낳았다. 가부장제사회에서 여성의 사회활동이 경시되던 시대에 새마을부녀회 활동이 장려됐다. 노동력 충원을 위한 것이었지만, 가사 노동에서 해방된 여성들이 외부에서 모여 스스로 무언가를 이뤄내는 경험을 공유한 것은 새마을운동을 고안해낸 이들이 예측하지 못한 결과였다.

도시와 농촌이 모두 ‘현대식’으로 바뀐 것은 분명했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이다. 친환경 마을 생태계가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인공의 공간이 돼 갔다. 마을에서 신처럼 섬기던 오래된 나무나 문화재들은 미신을 없애야 한다는 이유로 훼손되기도 했다. 길이 넓어지고 논과 밭도 말끔해졌으며 초가집은 슬레이트 지붕을 얻어 새롭게 변했다. 세상이 뒤바뀐 듯 농촌과 도심 마을 곳곳에서 큰 변화가 이뤄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웃과 혈연 중심으로 돌아가던 마을도 바뀌었다. 공동체 의식이 핵심이던 농촌은 자본주의적 환경으로 변모했다. 마을운동이 전개되던 1970년대, 농가의 평균 소득은 10배 증가했으나 부채는 21배 늘었다. 이익에 눈을 뜬 농민들은 삶을 일구던 농촌을 떠나 도시에서의 삶을 선택했다. 이재영씨도 “지금의 농촌이 몰락한 이유로 돈을 번 이들이 농촌을 떠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소득이 증가한 농사꾼들은 자녀들을 도시로 보내 안정적인 삶을 살길 바랐다.

김 교수는 “새마을운동의 다양한 측면을 연구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새마을운동은 빈곤 극복의 신화라는 이미지를 박 전 대통령에게 덧씌웠다. 덕분에 그를 신격화하는 근거로 쓰여 새마을운동 사업은 지지자와 비판자들에게 ‘박정희 미화사업’이라는 옹호와 비판을 함께 들었다. 김 교수는 새마을운동을 박정희시대의 정책으로만 볼 수 없다고 짚는다. 위로부터의 운동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새마을운동도 함께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10월29일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에 처음으로 참석했다. 문 대통령은 “오늘의 대한민국 밑바탕에는 ‘새마을운동’이 있다”는 치하와 “ ‘새마을운동’이 조직 내부의 충분한 합의와 민주적 절차를 통해 ‘생명·평화·공경 운동’으로 역사적인 대전환에 나선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라는 기대도 나타냈다. 과거의 운동이 아닌, 살아있는 운동이 돼야 한다는 주문도 함께했다.

앞서 박 전 대통령에게 훈장을 받고 해외 탐방을 다녀온 새마을운동 지도자들은 사실 새마을운동이 정부정책으로 추진되기 이전부터 자신의 마을과 농촌의 소득을 증대시키고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친 이들이었다. 척박한 땅에서 감귤밭을 일구거나(제주도), 좁은 농토에서 벗어나 해태(김) 양식에 성공한 이들(충남 태안)도 있었다.

해체된 마을 공동체를 살리는 일에도 새마을운동이 해야 할 역할이 있다. 김 교수는 “과거 새마을운동은 경제개발이나 소득증대를 위해 마을 공동체를 동원했고, 결국 성장과 이윤 추구가 지역 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됐다”며 이는 “새마을운동 시기에 마을 공동체가 빠르게 해체되는 모순이 생긴 원인”이라고 했다. 이어 “경제성장이나 환경운동 같은 사업과 목표를 이루는 수단으로 전국 단위의 조직과 마을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사정에 맞게 이웃과 마을주민들이 서로 협력하는 ‘마을 살리기’가 필요하다”며 “지역의 새마을운동 조직들이 각자 마을의 공동체성을 함양하는 일에 앞장서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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