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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 (수)

‘근면·자조·협동’ 따랐던 그들, 이젠 ‘생명·평화·공경’을 모토로 [커버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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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유산’으로 통했던 새마을운동, 2018년 진보 인사가 회장 맡으며 ‘환경 중심 사회운동’으로 탈바꿈…“기후위기 대응 위해 대전환 이룰 것”

[경향신문]

■‘잘살아 보세’ 구호 넘어, 진짜 ‘잘 살기’ 꿈꾼다

새마을운동 50년, 그리고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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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의 아파트 단지를 지나 나지막한 맹산과 영장산 자락으로 향하는 한적한 도로를 차로 5분가량 지나면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이 나온다. 새마을운동 지도자를 교육하는 이 연수원은 원래 수원에 있었다가 1983년 이곳에 자리 잡았다. 권위주의 통치 시기를 상징하는 작품 다수를 남긴 건축가 김수근의 건물답게 거대하고 웅장해 위압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인 전경환씨가 새마을운동의 실권을 쥐고 있던 당시 지어져 그때 새마을운동의 성격을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이곳은 새마을운동의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는 체험 학습장 역할을 하고 있다. | 관련기사 6·7면

연수원 내부는 대낮에도 복도 곳곳이 어둑하다. 새마을운동중앙회 직원들이나 전국 각지에서 교육을 받으러 온 이들이 계속 오가지만 복도나 사무실에는 전등을 켜놓은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에너지 절약을 위해 꼭 필요한 불만 켜놓기 때문이다. 본관 앞 국기게양대 앞에는 국내에선 쉽게 볼 수 없는 수직 태양광전지판이 설치돼 있고, 운동장 옆에는 성인 남성의 일일 물 사용량으로 채소류를 재배하는 최신 기술이 적용된 비닐하우스가 설치됐다. 직원 숙소 인근 유기농 경작지 위에는 ‘아사달-태양광 발전소’를 만들었다. 산과 들의 땅을 훼손하지 않고 활용 가능한 친환경 부품을 사용했다. 연수원은 지난 1년 동안 5000만원 이상의 에너지 사용료를 아꼈다. 연수원 전체가 ‘친환경 전시장’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1970년 ‘새마을 가꾸기 운동’에서 출발한 새마을운동이 올해 50년을 맞았다. “아직도 새마을운동이 있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조금만 의식하면 곳곳에서 나부끼는 새마을기를 발견할 수 있다. 다만 과거 교과서에서 보던 그 새마을운동과 성격이 조금 달라졌다. ‘잘살아 보세’를 외치며 박정희식 개발모델을 상징하던 새마을운동이 이제는 ‘생명·평화·공경’이라는 낯선 구호로 무장했다. 기와집을 올리고 길을 넓히는 삶이 아닌, 진정 ‘잘살기 위한’ 길을 모색하는 새마을운동의 시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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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4일 서울 강동구 새마을부녀회 회원들이 강동구청 강당에 모여 관내 어린이집과 복지시설에 전달할 면마스크를 만들고 있다. 새마을운동중앙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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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 한번 쳐줍시다.” 지난달 22일 경기 성남시 분당구의 새마을중앙연수원. 10여명이 띄엄띄엄 앉아 있는 강의실에서 김시형씨(64)에게 박수가 쏟아졌다. “교재를 미리 한 번 읽어 오신 분 손들어 보세요.” 예습 횟수를 묻는 강사의 질문이 ‘다섯 번’까지 이어질 때 손을 유일하게 들고 있던 이가 김씨였다. 대구 대신동 새마을협의회장인 김씨는 “달변이 아니고 ‘울렁증’이 있는데, 강사 교육을 받아야 하니까 긴장이 돼서 여러 번 읽어봤다”고 했다.

2박3일 동안 열린 ‘생명살림운동 현장강사 양성과정 지도자반’의 교재 첫 장에는 “새벽종이 울렸네”로 시작하는 새마을노래(박정희 작사·작곡) 악보가 있었다. 새마을운동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가장 성공적인 치적으로 꼽혀왔고, 그의 사후부터 현재까지 기념관을 짓거나 대학에 학과를 개설하는 등 새마을운동 관련 사업을 벌일 때면 ‘박정희 미화 사업’이라는 비판이 따라다녔다. 생전 박 전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은 유신이념의 실천도장’이라고 불렀기에 새마을운동과 박 전 대통령은 뗄 수 없는 관계처럼 여겨졌다.

현재 전국의 새마을운동 조직 지도자들이 보는 이 교재에는 악보 외에는 박 전 대통령의 흔적이 눈에 띄지 않는다. 악보 다음 페이지부터는 환경운동단체의 안내 책자에서나 볼 법한 내용들이 이어진다. 기후위기 등 지구환경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를 알리는 게 교육의 핵심이다. 그리고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한 유기농태양광 발전소 세우기, 온실가스를 줄이는 나무·케나프(양마) 심기, 에너지·비닐(플라스틱)·수입육고기 줄이기 등 기후위기로 전면적인 생명의 위기를 막기 위한 ‘생명살림 1건·2식·3감’ 운동이 강조됐다. 김씨는 다른 이들에게 생명살림운동을 가르치는 강사 자격을 얻기 위해 연수원을 찾았다.

김씨의 사촌형은 경북 안동 새마을운동 조직의 지도자였다. 그는 젊은 시절 고향의 마을길이 넓어지고 삐뚤던 논밭이 반듯한 모양을 갖추는 과정을 지켜봤다. 김씨는 1992년부터 새마을운동협의회 회원으로 활동해왔다. 중간에 10년의 휴지기는 있었지만, 근면·자조·협동이라는 새마을운동의 기본정신을 잘 인지하고 그 조직의 일원으로 다양한 봉사활동도 함께했다. 하지만 새마을운동 활동이 항상 떳떳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했다. 1997년 외환위기 때는 국가적 환란에 새마을운동 회원들과 봉사에 나서면서 보람을 느끼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청년들의 참여는 전무한 수준이라 침체된 분위기를 떨칠 수 없다고 했다. 초록색 새마을운동 유니폼을 입고 새마을기를 흔드는 보수단체 집회를 볼 때는 활동가 입장에서도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된다고 했다.

그럼에도 새마을운동을 지속하는 이유로 김씨는 “생명·평화·공경이라는 새로워진 새마을운동에 공감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념 대결이 아니라 생명의 위기에 반응하고 동참한다는 것이 새마을운동이 지금까지 보여주지 못했지만 꼭 해야 할 일이라고 느꼈다는 것이다. 김씨는 “ ‘잘살아 보세’라고 외쳤던 예전의 새마을정신이 현대사회에는 잘 맞지 않는 것 같다”며 “교육을 받으면서 지구가 이렇게까지 충격적인 상황인 줄은 몰랐다. 이제는 새마을운동이 환경을 위하는 일을 한다고 어디 가서도 떳떳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화장실 변기 물통에 벽돌을 넣는 물 절약 방법부터 자신이 운영하는 금은방 문을 열 때 매장 정리를 마친 뒤에야 전등을 켜는 식으로 에너지를 아끼는 작은 실천을 이어가고 있다.

■죽은 땅에 친환경 작물 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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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헌 새마을중앙회장. 새마을운동중앙회 제공


새마을운동중앙회는 바르게살기운동중앙협의회, 한국자유총연맹보수단체와 함께 정부 시책을 따르는 소위 ‘3대 관변단체’로 통했다. 보수적 정치색이 강했던 새마을운동의 모습이 확 달라진 건 2018년 3월 정성헌 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74·사진)이 새마을운동중앙회장으로 선출되면서부터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보수단체인 새마을운동중앙회의 수장을 진보계 원로인 정 회장이 맡게 됐다. 보수에서 진보로 단체의 정치색이 바뀌었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2년여가 흐른 지금은 정치적 색깔보다는 생명·평화·공경 운동을 내세운 사회운동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게 조직 자체 평가다. ‘생명·평화·공경 운동’은 생명의 위기, 공동체의 붕괴, 한반도의 새로운 평화체제에 대전환을 이뤄내는 것을 목표로 추진하는 새마을운동의 새로운 캠페인이다. 환경이 새마을운동의 핵심 화두로 떠오르면서 오랫동안 지역에서 활동해온 새마을운동 지도자들에게도 변화가 찾아왔다. 지역에서 소규모로 진행되던 환경 정화 활동이 탄력을 받기 시작했고, 다른 지역 간 연합 캠페인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지난달 27일 오전 부산 사하구 하단동에 있는 친환경 마을기업에 새마을운동 부산시사하구지회 회원들이 모였다. 이곳은 사하구부녀회에서 운영하는 마을기업으로 미생물발효액을 이용해 비누 등 각종 제품을 만들어 지역주민과 공유하는 일을 한다.마을기업은 가내수공업을 하는 작은 공장처럼 생겼다. 한쪽에는 발효액 제품을 만드는 공간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폐현수막을 이용한 장바구니나 재활용이 가능한 마스크를 만드는 재봉틀이 놓여 있다. 김나미 사하구새마을부녀회장은 “다들(회원들) 마스크 만드는 데 선수가 됐다”고 했다. 마을기업 내부에서는 ‘개인컵을 사용해요’ ‘플라스틱 사용을 줄여요’ ‘환경을 살리기 위해 비닐봉지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등의 글귀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날 사하구부녀회는 지역 환경단체인 낙동환경포럼, 청소년 봉사단체인 고니봉사단과 함께 하천 정화에 나섰다. 마을기업 바로 앞에는 바다로 이어지는 괴정천이 흐른다. 늘 악취를 풍겨서 주민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는 하천이다. 김 회장은 “주차 공간과 도로를 넓히기 위해 하천을 덮는 복개 공사를 했는데 생활하수 등이 흘러들어 밀물·썰물에 따라 악취가 심하다”고 했다. 회원들은 지난 몇 개월 동안 미생물발효액을 섞은 흙으로 ‘흙공’을 빚었다. 그렇게 만든 10여개 상자 분량의 흙공을 악취 퇴치를 위해 하천에 던졌다.

김 회장은 2011년부터 마을기업을 운영하면서 환경오염의 심각성에 대해 관심을 가졌지만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을 기회는 없었다. 그러다 생명살림 현장 강사 교육을 받으면서 막연했던 내용을 정리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하천 정화 활동을 벌이던 당일에도 여러 단체에서 온 참가자들에게 인간의 플라스틱 사용으로 죽어가는 거북이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마을기업에서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환경오염 방지에 대한 강연도 진행하고 있다.

케나프 육성도 사하구 새마을운동 회원들의 큰 관심사 중 하나다. 생육이 빠른 케나프는 온실가스나 대기오염 물질을 흡수하는 능력이 뛰어나 각광받는 1년생 친환경 작물로 케나프 심기는 새마을운동중앙회 차원에서도 중점적으로 벌이는 활동이다. 사하구에서는 지난 4월부터 신평동의 장림유수지에 케나프를 심었다. 공단이 몰려 있는 사하구에서 농사지을 만한 충분한 땅을 확보하는 게 어려웠다. 구청에 문의하자 ‘죽은 땅인데 괜찮겠느냐’며 장림유수지를 내줬다.

유수지의 얇고 좁은 실개천의 토양은 농사에도 적합하지 않았다. 진흙은 한눈에 봐도 검게 오염돼 있었다. 주변 공장에서는 매연이 뿜어져 나왔다. 몇 달 동안 중장비를 동원해 땅을 뒤엎고, 매일같이 회원들이 들러 관리에 나섰다. 장림유수지 내 주민들이 오가는 산책로를 따라 잡초가 무성하던 하천변에 케나프를 심었다. 지난달 27일 이곳을 찾았을 때 성인 남성 허리춤까지 자란 케나프를 볼 수 있었다. 진성남 부산시사하구지회 사무국장은 “처음엔 농사지을 줄 몰라서 고생을 많이 했다”고 했다. 여러 군데 땅을 구해 케나프를 심었는데, 초반에는 죽는 것도 많았다. 진 사무국장은 “케나프가 충분히 자라나면 이곳을 친환경 교육을 할 수 있는 체험장으로 꾸미고 싶다”고 했다.

■생명 가치 중심 ‘잘 사는 것’ 고민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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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오전 김나미 부산 사하구새마을부녀회장(첫 번째 사진)과 회원들이 지역 시민단체 등과 함께 괴정천 정화 활동을 벌였다. 새마을운동 사하구지회는 장림유수지에서 친환경 작물인 케나프 육성 사업(세 번째 사진)도 진행하고 있다. 전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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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 조직은 중앙회와 시·도, 시·군·구, 읍·면·동 마을 단위로 나뉘고, 크게는 남성 모임인 협의회, 여성 모임인 부녀회로 분류된다. 여기에 새마을문고 등 별도 조직이 있어 국내에서 가장 큰 단체 중 하나로 꼽힌다. 2019년 기준 전국 18개 시·도에 228개 조직이 있고, 지도자와 회원이 모두 201만1390명에 달한다.

새마을운동은 ‘농촌개발’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상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고 있다 보니 인구가 밀집한 도시 지역에 더 큰 규모를 이룬다.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 성산1동 주민센터에서 만난 새마을운동마포구지회 관계자들은 폐현수막을 모아 장바구니를 만들고 있었다. 재봉틀 앞에 앉아 능숙한 솜씨로 재봉틀을 다루는 구연태씨(63)는 35년 동안 세탁소를 운영했다. ‘드르륵’ 소리 몇 번이면 튼튼한 장바구니가 뚝딱 만들어졌다. 올해로 새마을운동 23년차인 구씨는 “40대 때 지역 봉사단체에 참여하는 개념으로 들어왔다”며 “예전에는 길거리 청소나 봉사활동을 주로 했는데, 요즘은 환경 문제에 집중하면서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고 있다”고 했다.

마포구부녀회장인 김설란씨(55)는 마포구 아현동 토박이다. 일대가 초가집이었던 시절이 생생하다는 김씨는 “새마을운동 하면 국민학생(초등학생) 때 쥐잡기 운동의 일환으로 쥐꼬리를 잘라오라는 숙제를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고 했다. 김씨는 “오랜 시간 이어진 새마을운동이 이제는 지구와 생존의 위기를 고민하는 식으로 바뀌었다”고 전했다. “말로만이 아니라, 후세의 삶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실천해 가고 있다”는 목소리에 자부심이 가득했다.

취재차 만난 새마을운동 참가자들은 대부분 장년층 이상이었다. 이들은 오랜 시간 활동했지만, 최근 몇 년 사이의 변화가 가장 컸다고 입을 모았다. 정성헌 새마을운동중앙회장은 지역사회 새마을 지도자들이 막연하게 느끼고 있던 기후위기에 대해 조직적으로 공감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정 회장은 “새마을운동에 참여하는 이들 대부분이 환경과 생태계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꼈지만 이를 구체적으로 언어화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취임 후 생명과 환경에 대해 이야기하자 이에 적극 동의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했다. 미세먼지·폭염 등의 기후 변화는 이제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이 됐다. 그는 “생명살림운동이 ‘폼 나는’ 활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하는 일이라는 데에 회원들이 공감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명분은 분명했다. 농촌사회에 만연한 패배주의를 없애고 잘살아 보는 것이 당시의 시대정신이었고 무엇보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게 절실했다. 하지만 이후 농촌 부흥과 마을 개발 운동이 동력을 잃으며 봉사활동 단체로 제자리에 머물렀다는 게 정 회장의 진단이다. 정 회장은 “이제는 생명의 가치를 중심에 놓고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과거 새마을운동의 근면·자조·협동의 정신을 실천 자세로 삼아 지구 생태계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함께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새마을운동에 대한 여전히 곱지 않은 시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새마을운동이 지금도 이뤄진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많다”며 “미래세대를 위해,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새마을운동이 나서 대전환을 이뤄보려 한다. 환경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실천을 통해 보다 구체적인 방법들을 연구해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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