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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6 (토)

갑질금지법 시행 1년, 현장 체감도 낮아…저직급·저연령·비상용직은 “갑질 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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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경향신문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인지여부 통계. 직장갑질119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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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씨는 요즘 상사의 폭언 때문에 퇴사를 생각한다. 전문대를 졸업한 그는 작은 중소기업에서 정규직 사무원으로 일한다. 상사는 하루를 꼬박해도 끝내기 힘든 일을 오후에 건넨다. 오늘 안에 끝내라고 다그치고는 추가업무를 해도 야근수당을 주지 않는다. ㄱ씨는 최저임금 수준의 월급을 받으며 상사의 독한 말을 듣는다. “너 아니어도 여기 들어오려는 애들 줄 서 있어. 예전에는 4년제 아니면 받아주지도 않았어”, “너 그 학력으로는 이 회사 나가면 받아줄 곳 아무 데도 없어. 고등학생 때 뭐했냐. 남들은 지방 4년제라도 돈만 있으면 들어가는데.”

직장갑질119가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갑질금지법) 시행 1년을 맞아 5일 발표한 설문조사에 나오는 사례다. 설문조사는 19~55세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지난달 19일부터 25일까지 일주일 동안 직장갑질 경험과 대응, 갑질금지법에 관한 인식, 직장갑질 감수성 지수 등을 물었다. 조사 결과 갑질금지법이 시행된 지 1년이 됐지만 현장의 변화 체감도는 높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직급이 낮을수록, 고용형태가 불리할수록, 연령이 낮을수록 직장 내 갑질이 여전하다고 느꼈다.

직장 내 괴롭힘의 빈도는 줄었지만 갑질 경험은 오히려 늘어났다. 조사 대상 45.4%(454명)가 지난 1년 동안 직장 내 괴롭힘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44.5%였던 지난해 조사 결과보다 0.9%p 늘어난 수치다. 갑질금지법의 실효성이 낮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반대로 갑질금지법 시행 후 갑질에 대한 시민들의 민감도가 높아져서 평소라면 그냥 넘어갔을 상사의 행동을 문제로 인식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 갑질금지법 시행 이후 ‘괴롭힘이 줄어들었다’는 응답은 53.5%로 줄어들지 않았다는 답변(46.5%)보다 높게 나타났다. 이에 따르면 법이 직장 내 괴롭힘 감소에 기여했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조사 대상을 세부적으로 분류해보면 직장갑질의 사정이 보다 선명해진다. 직장에서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직장 내 괴롭힘이 감소했다고 느낀 반면, 상대적 약자들은 갑질이 크게 줄었다고 보지 않았다. 연령별로 50~55세는 63.4%가, 40대는 57.0%가 갑질이 줄었다고 답했지만 30대는 48.8%, 20대는 46.1%만이 같은 답을 했다. 직급별로는 상위 관리자(75.9%), 중간관리자급(57.9%), 실무자급(52.9%), 일반사원(51.0%) 순으로 갑질 감소에 긍정적으로 답한 비율이 낮아졌다. 1개월 미만 근무자(44.4%)는 2년 이상 근무자(57.1%)보다, 비정규직(49.5%)은 정규직(56.2%)보다 갑질 감소를 덜 느꼈다.

법 시행 사실을 ‘알고 있다’는 응답도 응답자 특성에 따라 차이를 보였다. 정규직의 72.8%가 갑질방지법의 시행을 인지한 반면 비정규직은 절반 이하인 48.5%만이 ‘알고 있다’고 답했다.

직장에서의 직장내 괴롭힘 예방교육 여부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됐다. 조사 결과 정규직은 45.3%가 예방교육 경험이 있다고 답한 반면 비정규직은 20.5%만이 같은 답을 했다. 노동조합 조합원(54.2%)과 노조가 없어 가입하지 못한 사람(29.5%), 현 직장에서 1개월 미만 근무한 자(8.3%)와 2년 이상 근무자(42.7%) 사이에도 격차가 뚜렷했다. 직장갑질119는 “정규직, 사무직, 노조원, 공공기관, 민간대기업에서 교육 경험 비율이 높았다. 이는 직장 내 괴롭힘이 줄어들었다는 응답 특성과 일치한다”면서 “직장 내 괴롭힘 예방교육의 의무화가 법의 실효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라고 했다.

직장내 괴롭힘을 당한 뒤 회사나 노동청에 신고를 한 응답자의 비율은 3.0%에 불과했다. 직장인 45.4%가 갑질 경험이 있음에도 극소수만 법에 따라 신고를 한 것이다. 43.3%가 신고 후 지체없이 조사해야 한다거나, 피해자 보호에 나서야 한다는 등 직장 내 괴롭힘 발생시 사용자의 조치를 규정한 근로기준법 제76조의3을 준수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직장내 괴롭힘 관련 근로감독 현황 자료에 따르면 고용노동부에 들어간 갑질 신고는 4066건이지만 근로감독은 1%도 미치지 못하는 15건에 대해서만 이뤄졌다.

갑질금지법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직장인 85.1%가 가해자 처벌 조항 신설을 꼽았다. 사용자가 직장 내 괴롭힘 발생시 조치를 규정한 근로기준법 제76조의3을 이행하지 않는 경우 처벌하는 조항을 넣어야 한다는 응답도 81.2%에 이르렀다. 갑질금지법을 5인 미만 사업장이나 제3자(특수인)에 대해서도 적용하자는 응답 역시 각각 82.1%, 84.4%로 높게 나타났다.

오진호 직장갑질119 집행위원장은 “직장 내 괴롭힘 경험자가 조사 대상 절반에 가까운데도 신고자 비율이 3%밖에 되지 않는 건, 신고 시 당사자에게 닥칠 불이익에 대한 우려가 크기 때문”이라며 “사업주의 조치 미흡에 대한 처벌조항이나 예방교육 의무화 등 법·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했다. 권두섭 직장갑질119 대표는 “사용자에게 신고하도록 한 조항을 바꿔 노동청에 직접 신고할 수 있도록 명시해야 한다. 또 4인 이하 사업장이나 특수고용노동자들도 법의 보호를 받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문희 기자 moon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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