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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이슈 끝나지 않은 신분제의 유습 '갑질'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1년… 갑질은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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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72% “변화 無”… 모욕·명예훼손 30% 최다

“대응해도 달라지지 않아” 무기력감 호소

“노동청에 직접 신고·수평적 문화 필요”

세계일보

“회사에 나와서 제일 먼저 배운 일이 상사 책상 닦기예요. 다들 9시까지 출근하는데 막내는 7시30분에 나와서 책상 닦고, 상사가 볼 신문 가져다 놓고, 상사 컵을 닦아 원하는 비율대로 커피를 타서 올려다 놓으라고 합니다.”

직장인 김유미(28·가명)씨는 “위에서 군기를 잡는다며 신입만 들어오면 이런 갑질을 하고 대물림된다”면서 “이런 일들을 시키는 사람들이 소위 ‘고인물’(오래 일한 사람)들이고 계속 봐야 할 사람들이라 문제를 제기할 수조차 없다”고 하소연했다.

어렵게 취업 관문을 뚫은 청년들은 직장상사의 갑질과 나아질 것 없는 현실에 무기력함을 호소한다. 미래를 걱정하며 슬럼프에 빠지는 심리적 불안상태를 일컫는 ‘직장인 사춘기’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다. 직장 내 괴롭힘이나 부당한 처우 등 문제는 많은데 자신의 힘으로는 바꿀 수가 없다는 생각에 답답하고 불만만 쌓인다. 결국 직장인들은 오늘도 가슴에 사표를 품고 출근하는 게 현실이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1년… 직장인 절반은 여전히 갑질 시달려

지난 16일은 직장 내 갑질을 막기 위한 개정 근로기준법(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된 지 1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러나 직장인 10명 중 7명은 법 시행 이후에도 직장 내 괴롭힘 관련 행태가 그대로라고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한국고용노사관계학회가 지난 2∼8일 만 15세 이상 주요 산업 근로자 1000명 대상으로 온라인 패널조사를 한 결과, 개정 근로기준법 시행 이후 직장 내 괴롭힘 행위의 변화 정도에 대해 ‘변화 없음’이라 답한 비율이 71.8%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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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직장갑질119가 지난달 19일부터 25일까지 19∼55세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직장 내에서 괴롭힘을 겪었다고 응답한 비율이 45.4%(454명)에 달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직전인 지난해 조사(44.5%)보다 0.9%포인트 높다.

직장에서 겪는 괴롭힘 유형으로는 모욕·명예훼손이 29.6%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고, 부당지시(26.6%), 업무 외 강요(26.2%), 폭행·폭언(17.7%) 등이 뒤를 이었다.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로는 ‘임원이 아닌 상급자’(44.5%)가 가장 많이 꼽혔으며, ‘임원 또는 경영진’(21.8%), ‘비슷한 직급 동료’(21.6%) 등 순으로 나타났다.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다는 응답자 3명 중 1명은 ‘괴롭힘 수준이 심각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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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기업의 임원 수행기사 A씨는 “입사 첫날부터 ‘야, 너’ 하면서 반말을 하고, 폭우가 쏟아지는데 우산도 없이 담배 심부름을 시키거나 욕을 하기도 했다”면서 “그렇게 오전 7시부터 늦은 밤, 새벽까지 일했는데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그만두라고 했다”고 토로했다.

최저임금을 받고 일한다는 직장인 B씨는 “하루를 꼬박해도 끝내기 힘든 일을 오후나 퇴근 직전에 주고 오늘 안에 끝내라고 하는 등 추가 업무를 당연하다는 듯 시키면서 야근수당도 안 준다”며 “무엇보다 ‘이 회사 나가면 받아주는 데 없다. 그 학력으론 다른 데 취업도 못 한다. 고등학교 때 뭐했냐. 남들은 지방에 4년제라도 돈만 있으면 들어가는데 너는 그것도 못 갔냐’면서 저를 무시하는 말을 할 때 가장 견디기 힘들다”고 호소했다.

◆“말한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무기력 호소하는 직장인들

이처럼 직장 내 괴롭힘이 끊이지 않는데도 대부분의 직장인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조사 결과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고도 ‘참거나 모르는 척했다’고 답한 비율이 62.9%(복수응답)로 가장 높았다. 직장인들이 문제를 인식하고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이유는 무력감 때문이다. 참거나 모르는 척했다고 답한 응답자 67.1%가 ‘대응을 해도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 않아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인사 등에 불이익을 당할 것 같아 대응하지 않았다는 비율도 24.6%로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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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이번 조사에서 회사나 노동청에 직장갑질을 신고한 사람은 3%에 그쳤다. 그나마도 이들 중 절반 이상(50.9%)은 괴롭힘을 인정받지 못했다. 신고를 이유로 부당한 처우를 경험했다는 응답도 43.3%로 조사됐다.

외국계 회사를 퇴사한 직장인 이모(30)씨는 “직장상사가 회의 때마다 개인에게 모욕감을 느낄 정도의 심한 욕을 해 대체 내가 왜 여기에서 이런 욕을 들어야 하나 싶고 회사 가는 일 자체가 스트레스가 될 정도였다”면서 “그런데도 문제를 제기하지 못한 건 이걸 고발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 고발한 사람만 잘리고 말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씨처럼 직장 내 괴롭힘으로 퇴사를 선택하는 경우에도 직장인들은 자신의 퇴사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취업포털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지난 4월 퇴사 경험이 있는 직장인 2288명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 절반 이상(52.1%)이 “정확한 퇴사사유를 밝히지 않았다”고 답했다. 이들이 진짜 퇴사사유를 밝히지 않았던 이유로는 ‘알린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이 없을 것 같아서(41.2%)’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아서(26.1%)’, ‘업계가 좁으니까, 나중에 어떻게 다시 만날지 몰라서(14.8%)’가 뒤를 이었다. ‘진짜 퇴사사유를 알렸다가 불이익을 당할까봐’라는 응답도 10%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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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제기하면 바뀌는’ 회사 만들려면

전문가들은 계속되는 직장 내 괴롭힘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문제를 제기해도 바뀌지 않는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의 실효성을 높이고, 나아가 수평적인 직장문화를 조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직장갑질119 권두섭 대표는 “사용자에게 갑질 신고를 하도록 한 조항을 바꿔 노동청에 직접 신고할 수 있도록 명시하고 예방교육을 의무화해야 한다”면서 “4인 이하 사업장이나 특수고용노동자들도 법의 보호를 받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은 피해자에게는 문제 삼을 근거를 마련해줬고, 사용자에게는 과거에 없던 문제의식을 갖게 했다”면서 “다만 갑질 문제는 권력관계에서 비롯되는 문제인 만큼 근본적인 해결책은 평등의식 개선”이라고 했다.

윤지영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도 “상명하복과 집단주의적 직장 문화가 직장갑질 감수성을 떨어뜨리는 원인 중 하나”라면서 “결국 돈만 주면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노동자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 바뀌고, 노동자의 권리가 강화되어야 감수성도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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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 피해시 폭언 문자·녹음 파일 등 증거 확보 중요”

직장갑질의 보호장치인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준비가 필요하다. 전문가들은 상사의 갑질을 ‘내 탓’이라 생각하지 않는 마음가짐과 갑질 피해를 입증할 증거 확보를 당부했다.

15일 고용노동부 등에 따르면 개정 근로기준법 시행으로 10인 이상 사업장의 경우 사측은 직장갑질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 조치를 취하고, 괴롭힘이 발생했을 경우 어떻게 조치할 것인지 등을 취업규칙에 기재해야 한다. 직장 내 괴롭힘은 직장에서의 지위나 관계의 우위 등을 이용해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가하는 행위를 뜻한다.

폭력이나 욕설은 물론, 정당한 이유 없이 휴가를 쓰지 못하도록 하거나 의사와 상관없이 음주나 회식 참여를 강요하는 일도 직장 내 갑질에 포함된다. 특정 행위가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는지는 언제, 어디서, 얼마나 자주 발생했는지와 당시 상황은 어땠는지, 피해자가 받은 고통의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등 구체적인 사정을 참작해 판단된다.

고용부는 “문제가 된 행위를 피해자와 같은 처지에 있는 일반적이고도 평균적인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보았을 때, 신체적·정신적 고통이나 근무환경 악화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 인정돼야 한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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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직장에서 갑질을 당한 경우, 객관적 증거 확보가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자신이 참여한 대화를 녹음하는 것은 불법이 아닌 만큼, 상사의 부적절한 발언 등을 녹음한 파일과 문자 등의 자료를 모으는 것이 괴롭힘을 입증하는 데 도움이 된다. 녹음하지 못했다면, 자신이 당한 괴롭힘의 내용과 언제, 어디서 괴롭힘을 당했는지, 같은 자리에 있었던 동료가 누구였는지 등을 상세히 기록해놓는 것이 필요하다.

괴롭힘으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았다면 우선 적절한 병원 진료 또는 상담을 받고, 피해 사실을 회사 또는 노동청에 신고하면 된다.

시민단체인 ‘직장갑질119’는 이외에도 △내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가까운 사람과 상의하기 △보복 갑질에 대비하기 △유급휴가·근무장소 변경 요구 △노조 등 집단적 대응방안 찾기 등을 조언했다.

유지혜·이강진 기자 kee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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