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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아파트 이웃사촌’으로 살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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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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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노원구 하계동 한신 아파트 옥상에는 주민들이 가꾸는 텃밭이 있다. 200여평 규모에 주민들이 직접 가꾼 채소와 과일들을 공동수확하고 있다. / 김기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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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들부터 부모세대, 그리고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까지 한데 어울린다. 경로당 할머니들은 명절이 다가올 때마다 어린이집을 찾아가 한복 입는 법이나 세배하는 예절을 가르치고, 자녀·손주 세대들이 벌인 ‘효사랑 큰잔치’는 어르신들과 소통하는 또 다른 장이 된다. 세대 간의 소통만이 아니다. 주민들이 각종 취미나 살림 노하우를 전하는 ‘재능다방 모임’을 여는가 하면, 주민이 아니라도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치는 우편·택배 노동자들을 위해 시원한 음료를 전달하는 사업도 한다. 서울 성동구에 있는 아파트단지인 텐즈힐 1단지의 이야기다.

텐즈힐 1단지는 2015년 4월부터 첫 입주를 시작한, 그리 오래되지 않은 단지다. 1700가구가 넘는 대규모 아파트인데도 주민들 사이의 공동체가 잘 형성돼 있다. 그 덕에 상도 여러 차례 받았다. 지난 3월에는 국토교통부가 선정하는 ‘공동주택 우수관리 단지’ 가운데 최우수 단지로 뽑혔고, 2017년에는 서울시의 ‘공동주택 공동체 활성화 사업’에서 대상을 받았다.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공동체 모임을 만들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때가 입주 1년 뒤인 2016년부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1년 만에 가시적인 성과를 보인 셈이다.

아파트 공동체 모범 사례도 곳곳에
토박이들이 모여 살아 자연스레 만들어진 유대 없이도 텐즈힐 1단지가 아파트만의 공동체 활동에 성공한 데엔 다른 지역공동체와의 연결고리를 늘린 점도 큰 역할을 했다. 인근 고등학교 학생들이 재능기부로 참여해 초등학생 동생들을 가르치는 ‘마을학교’에서는 학생들이라서 가능한 신선하고 흥미를 끄는 주제의 특강이 이어졌다. 부스가 50개를 넘을 정도로 매년 성황을 이루는 아파트단지 축제에서 나온 수익금은 지역 사회복지시설 등에 기부하며 이웃 간의 정을 쌓았다. 여기에 뉴타운 사업 등으로 관내 아파트단지가 짧은 기간 안에 늘어나면서 지역주민 공동체 형성을 고민해온 구청의 지원도 있었다.

활발한 주민 참여가 공동체의 안착으로 이어지고, 공동체 활동에 주목하는 눈이 많아진 결과 투명하고 효율적인 아파트 관리를 위한 대책도 늘었다. 전자결재 시스템을 도입해 행정업무 처리속도를 높이고, 관리사무소 직원들도 단지 내 수선사항을 바로바로 처리할 수 있게 한 점은 전국의 아파트단지 가운데 1등을 차지하게 된 배경이 됐다. 이가빈 텐즈힐 1단지 공동체활성화단장은 “주민들의 의견을 우선으로 의사결정을 하고 입주민 전체가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이뤘던 공동체 활동들이 큰 점수를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텐즈힐 1단지처럼 아파트 공동체의 모범 사례로 꼽히는 아파트는 전국 곳곳에 있다. 하지만 주민 사이에 만들어지는 공동체적 관계를 기대하기 어려운 아파트단지가 더 흔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파트 거주 비율이 지난해부터 50%를 돌파했을 정도로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다는 점과 함께 국내의 인구이동률이 유독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왜 아파트에서는 더욱 공동체가 만들어지기 어려운지 알 수 있다. 잦은 이사 때문에 애초에 살고 있는 지역에 뿌리내리고 애정을 쏟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올해 상반기 동안 읍·면·동 경계를 넘어 집을 옮긴 인구는 398만여명에 달했다. 이사가 집중되는 2월과 3월을 제외하고 2분기(4~6월)만 보더라도 이동자 수는 179만명, 이동률은 14.0%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2%포인트 높아졌다. 2015년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하던 이동률이 다시 반등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웃나라 일본의 이동률이 4%, 미국이 11% 수준이라는 점과 비교하면 한국인이 유독 이사를 자주 다닌다는 점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에 인구이동 통계에 들어가지 않았던, 같은 읍·면·동 안에서의 이사까지 합산하면 5명 가운데 1명꼴로 해마다 집을 옮기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평균적으로 5년에 한 번 이사하는 셈이다.

입주자대표회의도 공동체 의식 갖춰야
한 지역에 오래 살지 않고, 게다가 아파트라는 주거 특성상 독립적인 생활공간을 강조하기 때문에 주민 공동사업에 관심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배경은 결국 공동체가 뿌리내리기 힘든 구조로 이어진다. ‘공동주택관리법’이 마련돼 있고, 각 지자체의 공동주택 공동체 지원사업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아파트에서 공동체 활동이 확산되는 속도가 느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 노계향 자치분권위원회 선임전문위원은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가 공동체와 주민자치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대표회의는 관리에만 초점을 맞춘 탓에 입주자 중 소수만이 참여하고 있어 주민 사이의 논란을 우려해 공동체 지원에 미온적이다”라고 말했다.

반면 서로 벽을 사이에 두고 사는 한정된 공간 안에 많은 인구가 모여 있기 때문에 오히려 아파트에서야말로 공동체 형성이 갈등 해결에 도움을 준다는 지적도 있다. 대표적인 문제가 층간 소음이다. 노 위원은 “층간 소음처럼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키는 문제도 주민들이 입주자회의와 관리사무소에 더해 자생적인 아파트 공동체까지 유기적으로 활동하게 하면 갈등의 많은 부분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파트 공동체가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는 이웃이 자주 떠나고 바뀔 수밖에 없는 현실 자체를 막아주진 못하지만 함께 이웃으로 지내는 동안만이라도 더 나은 공동생활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은난순 가톨릭대 교수(소비자주거학)가 지난해 11월 ‘공동주택 공동체 활성화 방안 정책토론회’에서 발표한 조사자료를 보면 공동체 프로그램에 참여한 주민들 가운데 이웃 간의 유대감이 증가했다고 응답한 비율은 68.5%, 주민활동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증가했다고 한 비율도 72.5%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은 교수는 “주민들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단지별로 맞춤식 지원을 하거나 사업비 처리 등의 제도개선이 이뤄지면 아파트 관리 전반에 대한 만족도와 공동생활 의식 수준이 모두 높아질 것으로 기대됐다”고 말했다.

보다 큰 차원의 정책적·사회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아파트 한 채를 통해 얻는 자산가치 변화에는 민감하지만, 주민 사이에서 안정적인 공동체가 형성될 경우 쌓이는 사회적 자본의 가치에 대해선 이해가 부족한 탓에 정부와 주민 모두 현안을 외면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김찬동 충남대 교수는 “아파트단지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 상호 신뢰를 주고받으며 현대도시에서의 포괄적인 사회적 자본을 형성할 수 있는 곳”이라며 “주민이 주권을 가진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일종의 ‘타운미팅’을 통해 다양한 의사결정이 손쉽게 이뤄지도록 기구를 정비하면 아파트 자치도 더욱 활성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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