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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첫 여름휴가 택배노동자 “설렘 반 걱정 반 여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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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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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택배 없는 날’ 앞두고
여행다운 여행에 들뜨지만
늘어날 물량에 걱정스럽고
못 쉬는 집배원엔 ‘일감 폭탄’
“일회성 아닌 근본 논의 필요”

“아빠 일 안 해? 일 안 하면 큰일 나잖아. (같이 일하는) 삼촌들한테 욕 먹는 것 아냐?” CJ대한통운의 7년차 택배노동자 장호성씨(43)가 아이들에게 가고 싶은 여름 휴가지를 묻자 걱정 섞인 물음이 돌아왔다. 장씨가 “아냐, 이번엔 아빠 진짜 휴가야. 택배가 아예 없어”라고 말하자 그제야 아이들 표정이 밝아졌다. “진짜?” “우리 그럼 텐트 치고 놀면 안 돼?” 중학교 1학년 맏이부터 네 살 막내까지, 장씨네 일곱 식구는 한껏 들떠 휴가 떠날 펜션을 찾았다.

장씨는 “재작년에 초등학생 아이들 방학숙제 제출용으로 사진만 찍기 위해 부산 바닷가에 잠깐 다녀온 걸 빼면, 택배 일을 시작한 뒤로 제대로 된 휴가를 가본 적이 없다”며 “처음으로 여행다운 여행을 떠날 수 있어 아이들이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8월14일이 ‘택배 없는 날’로 정해지면서 택배노동자들은 올해 처음 공식 휴가를 떠난다. 전국택배연대노조는 CJ대한통운, 한진, 롯데, 로젠 등 택배사들이 가입한 한국통합물류협회와 합의해 오는 13일 택배를 접수하거나 한군데로 모으는 업무를 하지 않기로 했다. 처음 맞는 ‘택배 없는 날’을 두고 택배노동자들 사이에선 기대와 우려가 교차한다. ‘택배 없는 날’을 앞둔 택배노동자 세 명의 이야기를 들었다.

전북에서 올해로 9년째 택배 일을 하고 있는 CJ대한통운 소속 양영호씨(43)는 휴가는 반갑지만 다음날부터 쌓일 물량이 걱정스럽다. 양씨는 “택배노동자들에게 휴가는 ‘양날의 검’으로 여겨지기도 한다”며 “휴가를 다녀오면 물량이 밀려 업무강도가 평소보다 1.5배는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양씨는 코로나19 사태로 평년보다 50% 정도 증가한 물량을 처리해왔다고 전했다. 이어 “휴가를 다녀와도 과도하게 물량이 밀리지 않게 조정해줘야 택배노동자들이 제대로 쉴 수 있는데 회사는 그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면서 “ ‘쉬었으니 열심히 일하라’며 2배 가까이 늘어난 물량을 쏟아부으면 개인사업자인 택배노동자들은 거부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택배 없는 날’에 쉬지 못하는 택배노동자도 있다. 13년차 집배원인 오현암씨(39)는 14일에도 일을 나선다. 한국통합물류협회에 속하지 않는 공공기관 우체국은 13일에도 택배접수를 받기로 했다. 우체국 위탁택배원 3800여명은 14일 휴가를 떠나고, 집배원들이 물량을 도맡는다. 오씨는 “우정사업본부는 계약업체 이탈과 공공성을 이유로 13일 택배접수를 막지 않았다”며 “우정사업본부는 집배원들이 14일에도 평소만큼의 물량을 소화하도록 하겠다지만, 현실적으로는 위탁택배원이 담당하던 신선식품 등 물량이 몰릴 확률이 높다. 현장에선 ‘우릴 지금 죽이려는 거냐’는 말까지 나온다”고 했다. 지난 2월 경북의 한 우체국에서는 설 연휴를 앞두고 40대 집배원이 과로로 쓰려져 숨졌다.

‘택배 없는 날’은 역설적으로 택배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현실을 드러낸다.

같은 택배 일을 하면서도 고용형태가 제각각인 택배 업계에서 휴가란 동료에게 전가되는 부담이거나 택배노동자 개인이 떠안아야 할 비용이다. 오씨는 “집배원은 (14일이 아닌) 다른 날 여름 휴가를 쓸 수 있지만, 1년에 20여일 주어지는 연차 중 평균 2.5일밖에 사용하지 못한다”며 “누군가 쉬면 동료들이 물량을 나눠서 처리해야 한다. 서로 힘든 걸 알기 때문에 최대한 연차를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양씨는 “동료한테 부담을 주지 않으려면 택배 일을 대리해줄 기사를 찾아 하루 수익의 2.5배에 달하는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택배노동자들은 ‘택배 없는 날’을 계기로 휴가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양씨는 “이번 ‘택배 없는 날’은 택배사들이 마치 시혜를 베풀 듯 결정했다. 갑작스러운 결정에 (택배를 접수하는) 업체의 항의 전화는 모두 택배노동자들이 감내해야 했다”며 “정기적으로 택배노동자의 휴가를 논의할 수 있는 기구가 마련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장씨도 “이번에는 택배사들의 호응으로 물량을 없애 ‘휴가 아닌 휴가’를 만든 것”이라며 “(궁극적으로) 휴가란 건 노동자가 필요할 때 갈 수 있고, 계획할 수 있도록 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희진·이창윤 기자 h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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