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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일)

[세상읽기]다작과 역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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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89년에 생전 처음으로 학회라는 곳에 참석했다. 미국 애리조나주에서 열린 정수론 분야의 학회였는데, 대학원생에겐 여비가 제공된다는 말 한마디에 아무 생각 없이 여행 삼아서 갔다.

흥미진진한 강연도 있었지만, 이해하기 힘든 강연이 더 많았다. 저녁이 되면 당시 비슷한 처지로 함께 갔던 싱가포르 출신의 링산과 맥주를 홀짝이며 “우린 참 아는 게 없는 바보구나”라고 자조해야 했다. 시간은 살처럼 흘러서 그는 난양공대 부총장이 됐다.

경향신문

박형주 아주대 총장


내가 모르는, 어려워 보이는 내용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건 기이한 느낌이었다. 항상 친절한 듯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듯 ‘날 선’ 질문을 던지고 ‘쎄게’ 답변하는 장면도 신기했다. 이곳에서 현대 정수론의 전설적 인물인 하버드 대학의 존 테이트 교수를 만났다. 할리우드에서 막 온 듯한 멋진 외모의 이 수학자는 주저하며 멍청한 질문을 던지는 햇병아리에게도 너무나 친절했고 나의 새로운 영웅이 되었다.

작년에 9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미국 수학자 존 테이트는 논문을 잘 안 쓴다는 ‘명성’을 지녔다. 그의 1950년 프린스턴대학 박사 논문은 정수론에 푸리어 해석학을 도입하며 보형형식 이론 등에 큰 영향을 끼치고 세계적인 이슈가 되었는데, 정작 사람들은 그의 논문을 구할 길이 없었다. 이미 끝낸 연구에서 흥미를 잃어버린 테이트가 논문으로 출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17년이 지나서야 다른 수학자들이 그에게 사정하여 겨우 출간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주요 연구 결과를 학회나 세미나 등에서 발표하여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곤 했지만, 정작 자신은 빠르게 흥미를 잃어서 출간은 하지 않는 바람에 동료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테이트의 많지 않은 저술의 상당수는 다른 수학자들이 그의 발표를 듣고 대신 기록하여 출간했다. 물론 그의 동의를 얻기 위해 절친한 수학자들이 나서야 했다.

소설가나 시인 중에는 평생 수많은 작품을 저술해서 족적을 남긴 사람이 있는 반면, 소수의 명작을 남긴 대가도 있다. 과학의 역사에도 이런 두 유형의 과학자들이 나타난다. 존 테이트에 대비되는 다른 극단으로 헝가리 출신의 수학자 폴 에르되시를 들 수 있다. 에르되시는 평생 511명의 공저자와 1500편 이상의 논문을 썼는데, 아직 이 기록을 깬 수학자는 없는 것 같다. 그는 여행 중에서 만난 수학자들과 대화하면서 많은 난제를 풀었고 이 결과들은 공동 논문의 형식으로 출간됐다. 수학의 역사에서 ‘소통과 협업의 힘’을 에르되시만큼 실행하고 증명한 사람이 있을까.

수학의 역사에서 다작의 또 다른 예는 18세기의 오일러다. 스위스 출신의 오일러 사후에 편집된 연구 논문집만 900권 이상의 분량이었다. 다작의 과학자는 연구의 깊이에서 아쉬운 경우가 많다는 속설도 있지만, 적어도 오일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는 수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깊이 있는 연구를 했을 뿐 아니라 역학과 천문학 등의 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업적을 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학자를 논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거론된다.

그 반대의 극단으로 19세기의 가우스를 들 수 있다. ‘수학의 왕자’라고 불리곤 하는 독일의 대수학자다. ‘적지만 잘 익은(few, but ripe)’이라는 모토를 가진 완벽주의자여서 출간된 저작물은 많지 않다. 역사상 최고의 천재를 논할 때 꼭 거론되는 가우스는 유아 때부터 천재성을 나타냈고, 7세에 등차수열의 합 공식을 발견했다는 일화를 남겼다.

극단적으로 다른 연구 스타일을 가졌던 에르되시와 테이트는 모두 이스라엘이 수여하는 최고의 상인 올프 프라이즈와 정수론 분야의 최고 상인 콜 프라이즈를 받았다. 두 사람이 20세기 최고의 수학자라는 데는 큰 이견이 없다. 양과 질의 경계는 그리 분명한 선이 아닌 모양이다.

박형주 아주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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