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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직설]기성세대와 다른 ‘청년의 정무적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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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정무적 판단’이라는 말을 종종 쓴다. 한 사안에 판단이 필요할 때 논리나 윤리에 근거하기보다는 정치적 상황, 행정적 환경 등을 고려하여 판단한다는 뜻인 것 같다. 쉽게 말해, 정치적 눈치를 본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이 책임회피할 때나 사용하는 단어인 줄 알았는데, 막상 그렇지도 않다는 걸 깨닫고 있다.

경향신문

조희원 청년참여연대 사무국장


지난 7월9일 박원순 서울시장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의 죽음은 개인의 죽음이 아니었다. 그와 일면식 없는 나조차도 첫 실종 기사가 떴을 때 “이제 우리는(아마도 서울 청년 시민을 의미했던 것 같다) 어떡하지”라는 말만 반복했으니까.

이 사안을 둘러싸고 개인적으로 ‘정무적 판단’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들었다. 시민사회에서 존재감이 너무 컸던 사람이었기에, 시민사회단체들은 단체의 이름으로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내용은 달랐다. 여성단체는 조의 표명과 함께 2차 가해 금지, 진상규명,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적 대안 등을 촉구했지만, 나머지 단체의 입장문은 아니었다. 의도야 다를 수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가 남긴 발자취를 기억하려는 슬픔의 글로만 보였다. 시민운동가 박원순만 기억하는 것, 그것이 그 단체들의 정무적 판단인 셈이다.

이 간극이 여성단체와 그 외 단체에서만, 혹은 여성과 남성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견해차라고 생각지 않는다. 나는 청년활동가라는 이름으로 살지만, 공식적인 자리나 심지어 사석에서도 ‘세대갈등’이라는 단어 쓰기를 극히 꺼린다. 나의 의견이 청년을 대변하지도 않으며, 청년세대는 한 가지 정체성을 가진 균일한 집단도 아니다. 흔히 말하는 세대갈등은 사실 같은 세대 안에서도 존재하며, 열고 보면 사회경제적 격차가 만들어낸 갈등인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이상하게 박 전 시장의 죽음을 둘러싸고 세대 간극을 극명하게 느꼈다. 내가 ‘활동가’라서 더 그랬을 수 있다. 주변에 진보임을 자처하는 동료, 선배가 많다는 뜻이며, 박 전 시장과 뜻을 같이했던 옛 동료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미 많은 사람이 소위 ‘진보 지식인’들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게시물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나는 말해야겠다. 누군가 박 전 시장의 공과 과는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렇게 생각한 그의 정치적 감수성은 1986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뛰어난 한 개인이 어떻게 도덕적으로도 완전무결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인권을 모르는 것이다. 특히 권력형 성범죄는 가해자의 양심, 도덕성, 젠더감수성이라는 개인적 특성 영역을 넘어 정치·사회적 엄벌이 필요한 중범죄다.

21대 국회의 청년 여성 의원인 류호정, 장혜영은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우려와 피해자와 연대하겠다는 의지로 박 전 시장을 조문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우습게도 그들의 정치적 결정을 ‘정무적 판단’으로 번복한 것은 윗세대인 그 당의 심상정 대표였다. 류·장 의원의 공개 조문 거부에 대해 일부 정의당원들의 반발도 있었지만 이들의 행동에 대한 지지의 표명으로 2030 여성의 입당이 이어졌다. 또한 권력형 성범죄 피해자들과 연대하기 위해 온라인에서 <김지은입니다> 구매인증이 이어지기도 했다.

이것이 청년의 정무적 판단이다. 청년은 가만히 있지 않겠다. 이제 우리는 이 시대의 정치를 하겠다. 일상의 폭력과 피해자 앞에 정무적 판단을 핑계로 변화를 앞에 두고 뒤만 돌아보는 정치를 하지 않겠다. 누군가의 간절한 피해호소를 외면하는 기성세대의 낡은 정치에 “모두 안녕”을 전한다.

조희원 청년참여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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