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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4 (화)

첫 소설집 ‘어떤 물질의 사랑’ 출간한 천선란 작가, 그의 SF “인간이 비주류가 되는 지구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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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경향신문

소설집 <어떤 물질의 사랑>을 펴낸 소설가 천선란을 지난달 28일 서울 정동에서 만났다. 천선란은 지난해 첫 장편소설 <무너진 다리>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뒤 올해 장편 <천 개의 파랑>으로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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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주인 행세하는 인간
그 오만함에 대한 문제제기
현란한 SF 장치 많지 않지만
단단한 문제의식으로 ‘여운’

“내 인생의 첫 난제는 내가 여성이냐, 남성이냐는 거였다.” 천선란(27)의 단편소설 ‘어떤 물질의 사랑’에서 화자인 ‘나’는 일곱 살 때 배꼽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얼마 뒤, 자신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믿기 힘든 출생의 비밀을 듣는다. 나의 ‘다름’으로 인한 혼란은 이후에도 계속되는데, 같은 반 남자아이에게 처음 사랑의 감정을 느낀 뒤 여성이라고 믿었던 몸이 남성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 사실을 알려준 엄마는 태연하다. “어떻게 되냐니? 그냥 남자의 호르몬을 가지는 거지. 변하는 건 없어. 그냥 그렇다는 걸 네가 알아둬야 앞으로 네 몸의 변화에 놀라지 않겠지.”

소설은 그 제목처럼 ‘어떤 물질의 사랑’ 이야기다. 작가는 “우주를 가로질러서라도 너를 찾아올 사랑”을 만나라는 엄마의 말을 통해 배꼽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곳에 있는 모두가 서로에게 외계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소설 마지막 문장에서 천연덕스럽게 묻는다. “나를 만나고 싶다면 당신도 주저하지 마시길. 당신이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든 나는 이렇게 대답해줄 테니까. 그렇군요.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그럼 혹시 배꼽도 없으신가요?”

사막에 대한 글을 써보라는 아버지 말에 ‘아직 별이 뜬 사막’을 꿈꾸며 우주비행사가 된 딸의 이야기(‘사막으로’)부터, 사랑하는 이를 위해 150번의 의도된 교통사고마다 반복해 몸을 던지는 안드로이드(‘마지막 드라이브’)까지. 천선란의 첫 소설집 <어떤 물질의 사랑>(아작)은 각자의 상실과 외로움을 견디고 살아가는 이들, 그리고 이들의 시선이 향하는 서정적인 우주를 펼쳐 보인다. 현란하게 독자를 휘어잡는 SF적 장치는 많지 않지만, 단단한 주제의식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며 읽는 이에게 가볍지 않은 여운을 남긴다. 지난해 9월 첫 장편 <무너진 다리>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뒤 올해 두 번째 장편 <천 개의 파랑>으로 한국과학문학상 대상을 수상하며 단숨에 SF 독자들에게 존재를 각인시킨 천선란을 지난달 28일 만났다.

천선란은 “동식물이 주류가 되고 인간이 비주류가 되는 지구를 꿈꾼다”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환경과 지구를 파괴하고, 그럼에도 우주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는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문제의식이 그의 소설에 짙게 깔려 있다. 바다를 잃어버린 인간이 토성의 얼음위성 엔셀라두스에서 외계 생명체와 조우하는 내용을 담은 단편 ‘레시’가 그렇다. 탐사대원 ‘승혜’는 외계 해양생명체 ‘레시’에게서 죽은 딸을 떠올리고, 레시를 생포해 지구로 데려갈 것인지를 두고 다른 이들과 논쟁을 벌인다.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면서도 낙관적인 소설 결말에 대해, 천 작가는 “호소하듯 마지막을 썼다”고 말했다. “돌고래가 보고 싶다면 수족관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바다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구의 주인이 인간이 아니듯, 행성의 원래 주인이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어요.”

장편 ‘천 개의 파랑’ 곧 출간
“치매 어머니가 기억한 내 꿈
‘작가’를 포기할 수 없었다”

분함과 억울함, 쓸쓸함과 서러움, 외로움과 기괴함. 천선란은 ‘작가의 말’에서 자신이 간직해오던 이런 감정들을 소설집에 담았다고 썼다. “그 물체는 어떤 소음도 없이 찾아왔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단편 ‘두하나’는 동아시아 상공에 정체 모를 물체가 나타난 뒤 남성들이 좀비로 집단 변이된 세계를 그린다. 살아남은 여성들의 공동체, 좀비떼와의 전투를 담은 이 소설은 “서글펐던 새벽에 몇 번이나 생각했던 문장”이 그 시작이 됐다고 한다. “지난해 여성 연예인 두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는데, 같은 또래 여성으로서 너무 큰 상실감을 느꼈어요. 그 일엔 악성 댓글이나 디지털 성폭력 문제도 얽혀 있었고요. 그때 느낀 감정을 모른 척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이 소설을 쓰게 됐습니다.” 소설의 말미, 남다른 능력이 있고 그 능력 때문에 좀비들과 마지막 전투를 치르는 소녀 ‘하나’를 보내며 ‘지나’는 말한다. “너로 인해 세상은 바뀔 거야. 너는 승리할 거야. 그렇지만 하나야. (…) 그 세상에 네가 꼭 있어야 해. 네가 꼭 승리를 목격해야만 해.” “그게 우리의 승리일 테니까.”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한 천 작가는 오랜 꿈이자 치매를 앓는 어머니가 유일하게 기억한 말, ‘작가’를 포기할 수 없어 소설을 썼다고 한다. “7년 전 어머니가 뇌출혈로 갑자기 쓰러졌고 합병증으로 기억이 온전하지 않으세요. 처음엔 본인 이름도, 제 이름도 기억 못했는데 제 꿈이 작가라는 건 기억하시더라고요. 취업을 준비하던 차에 ‘엄마도 안 잊은 꿈을 내가 왜 포기하려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병실을 오가며 쓴 소설의 결과물이 이 책이다.

소설 쓰는 것이 어렵고도 즐겁다는 그는 “누군가 제 소설을 보면서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첫 소설집에 이어 장편 <천 개의 파랑>도 이달 중 출간된다. 더 빠른 경기를 위해 도입된 AI 기수와 안락사를 앞둔 경주마의 이야기다. 소설가 김초엽의 추천사처럼 “밀려드는 감정의 파도에 그대로 잠기고 싶은 소설”을 기다려온 SF 독자들이라면, 천선란이 펼쳐 보이는 서정적인 우주에서 ‘레시’가 지구인에게 건네는 첫인사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만나서 반가워요. 당신을 기다렸어요.”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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