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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공감]선동가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선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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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종종 미디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거리를 둔다. 사회적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교묘한 논리로 세계를 단칼에 양분하는 선무당들의 굿판이 고통스러워서다. 사실 확인조차 무시하는 조악한 기사의 범람 속에서, 그나마 깊이 있는 논의로 중심을 잡던 SNS 공간마저 흑백논리가 난무할 때는 정상적인 멘털을 유지하기 힘들다. 감각적 선동이 초래하는 비극을 무수히 학습하면서도, 어째서 사람들은 늘 열광적 행위에 빠져드는 것일까.

발터 베냐민, 아도르노, 하버마스 등 20세기 초중반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했던 뛰어난 철학자들 중 하나인 레오 뢰벤탈은, 선동가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경향신문

박선화 한신대 교수


첫째는 음모론, 즉 ‘당신은 속고 있다’는 주장을 계속한다. 악마 같은 자들의 속임수에 의해 선량한 이들이 바보 취급을 당한다며 억울함과 의혹을 부추기는데, 당시 서양 사회에선 유대인이나 공산주의자, 뉴딜주의자 등이 주요 표적이었다. 혁명기 공산국가들은 자본가나 지식인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둘째, 진보 정부란 무정부주의나 다름없다는 논리와 함께 세금 강탈에 대한 분노를 고조시키고, 당장 막지 않으면 모두 망할 것이라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셋째, 외국인이나 타 집단에 대한 편견을 강화한다. 타지에서 들어온 흰개미들이 우리의 둥지에서 알을 까고 있는데, 이를 방조하는 정부 역시 신뢰할 수 없다며 음모론을 더한다. 코로나19 초기의 선동가들이 떠오른다. 넷째, 나와 의견이나 출신이 다른 이들은 기생충이나 파충류, 세균같이 응당 사라져야 할 적들이기에, 그들을 박멸하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받을 필요는 없다고 혐오를 부추긴다. 역사의 모든 잔혹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약 100년의 시간이 흘렀으나, 요즘의 선동가들에 대한 묘사인 듯 생생하다. 종말론 교주처럼 당장 하늘이 무너질 듯 소란을 피워대는 이들이 노리는 것은 무얼까. 뢰벤탈의 또 다른 항목을 보면 이해가 쉽다. “다섯째,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서 생각은 사치다. 진정한 개혁가이자 순교자인 내가 나서서 쓰레기들을 치워 주겠다. 그러니 어서 나에게 돈과 힘을 다오.”

이들은 포섭 대상의 이성적 사고를 가장 경계한다는 점에서 보이스 피싱 범죄자들과도 비슷해 보인다. 당장 돈을 입금하지 않으면 가족이 무사하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정신 줄을 놓게 만든다. 더 나쁜 점은 개인의 피해를 넘어 사회 전체에 증오와 불신을 광범위하게 전파한다는 것이다.

SNS에 고양이가 아프다며 올린 사진에, 고양이는 없고 눈물 흘리는 본인의 얼굴만 있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약자를 걱정하는 듯하지만, 본심은 자신의 선량함을 알리고픈 의도가 우선한다는 이야기다. 정도를 넘어서는 지식이나 부의 자랑과 마찬가지로, 과도한 선량함과 정의감의 표출도 나르시시즘에 가까울 것이다. 선동가들의 시선과 관심이 머무는 최종 소실점에 무엇이 있는가를 살펴보면, 그들이 그토록 걱정하는 서민과 약자들 역시 단지 자신의 자기애를 드러내는 소재이자 유무형의 권력을 위한 수단일 뿐임을 알 수 있다.

성숙한 이들도 위기를 경고하거나 의혹을 제기하고 때로는 분노한다. 그러나 공포와 분열의 언어를 쉽게 사용하지 않으며, 나와 다소 다르다는 이유로 혐오를 조장하지 않는다. 부패와 폭력을 비난하고 응분의 대가를 요구하지만, 인간이기를 포기한 저열한 언행이나 잔혹한 처단을 원하지도 않는다. 미문과 논리로 포장해봤자 미성숙한 자들의 이지메 문화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신 혹은 자신과 친밀한 개인이나 집단이라고 해서 흠집 없는 권력을 행사한다고 과신하지 않는다. 어떠한 인간도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렇다. 빛과 그늘이 공존하지 않는 세계는 없다는 단순한 사실만 깨우쳐도 그토록 선명한 흑백을 추종할 수는 없다.

박선화 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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