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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노명우의 여행으로 쓴다]역관 이언진의 눈을 뜨게 한 ‘국경 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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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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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에 긴 장마까지 더해지니 활동 영역은 줄고 더 내향적이 되었는데 다행히 읽을 책이라도 있어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었다는 느낌은 받지 않는 요즘이다. 여행자들의 글을 읽으며 눈으로 여행하다가, 18세기에 베이징과 에도를 다녀온 이언진을 알게 되었다. 이언진은 박지원과 동시대인이지만 박지원과 달리 널리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이언진은 죽기 전 자신이 쓴 초고를 불태웠다. 아내가 불구덩이에서 건져 낸 일부 원고만 전해진다. 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갈 때의 견문을 담은 <해람편(海覽篇)>과 한양 골목길의 세상물정을 시 형식으로 쓴 풍속화라 할 수 있는 <호동거실>이 그가 남긴 글의 전부이다. 사후 명성을 얻는 천재도 많다지만 그조차 유독 이언진을 비껴간 까닭은 남겨진 글이 많지 않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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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


그는 역관이다. 신분으로 말하자면 중인이다. 노비가 아니기에 다행히 글을 익혔고 역관까지 되었으나, 사대부가 아니기에 그가 익힌 글과 재주만으로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기엔 역부족이다. 그래도 이언진은 자력으로 역관의 자리를 얻은지라 당시로선 매우 진귀한 여행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베이징에 두 번이나 다녀왔고, 1763년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에도에 다녀온 후 1766년 27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에게 조선은 신분적 제약을 가하는 족쇄이다. 조선 밖으로의 ‘국경 넘기’ 경험과 신분제의 족쇄를 벗어던지고 싶은 절실한 마음이 만나 이언진의 눈을 뜨게 한다. 그는 존재의 다양성을 여행을 통해 발견한다. 그가 쓴 <바다를 구경하다>의 일부를 읽어본다. “땅덩이 위에 수많은 나라, 바둑돌과 별처럼 벌여 있구나. 오와 월에서는 머리를 땋고, 천축에서는 머리를 깎으며, 제(齊)나라와 노(魯)나라 옷은 소매가 넓고, 북방의 호(胡)와 맥(貊)은 털옷을 입네, 혹은 문채가 있고 예도가 있으며, 음악은 거칠고 야만스럽지만, 무리로 나누어지고 끼리끼리 모여, 땅에는 온통 인간들이네.” 당시로서는 드문 그리고 진귀한 수평적 다양성 세계인식이다.

그는 여행이라는 견문의 과정을 통해 바다 건너에는 오랑캐가 산다는 조선의 상식에서 벗어난다. 그의 눈으로 본 오사카는 이렇다. “오사카는 실로 큰 도회지라 온갖 보배를 바다에서 건졌으니 빛나는 건 질 좋은 은이고 둥근 건 홍마노라네.” 베이징에서 그는 마테오 리치를 알게 되었고 “땅이 둥글다는 시비와 바다의 섬, 갑과 을은 서양 사람 마테오 리치가 실로 짜고 칼로 베듯 나누었네”라고 썼다.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에도로 가던 중 그는 가메이 난메이와의 필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재주 있는 사람을 낳는 건 특정한 곳에 한정되지 않아, 해 뜨는 곳과 해 지는 곳 사이에 차이가 없군요.” 나라마다 입는 옷이 다른 게 세계의 다양성이라면, 어디에나 재주 있는 사람이 있는 게 세계의 보편성인데, 그 재주 있는 사람이 신분의 틀에 갇혀 인정받지 못함도 신분제가 유지되고 있는 세계의 보편성임을 깨달은 그는 말한다. “천하와 만고의 일에 박학하고 경전에 통달하며 문과 질이 다 훌륭하고, 학식이 왕도와 패도를 두루 알며, 도가 성현에 이른 자는 모두 재야에 있습니다.”(오쿠다 쇼사이와의 필담 중)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깊은 병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시는 투식을, 그림은 격식을 따라선 안 되니, 틀을 뒤엎고 관습을 벗어나야지”라고 결심하지만 중인이라는 신분은 그의 발목을 잡는다. 자신처럼 미천한 신분이 남긴 글을 후대에 누가 읽어줄까 싶어 그는 원고를 불태웠다. 이언진은 자신이 어느 나라 사람이라 생각했을까? 아니 그에게 자신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가 중요한 문제였을까? 자신에게 국적을 부여하는 이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감옥”이고 “빠져나올 어떤 방법”도 없는 곳이라면. 자신과 신분이 다른 사대부와 국적을 공유하는 게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한 이언진은 이렇게 말했다. “이따거의 쌍도끼를 빌려 와 확 부숴 버렸으면, 손에 칼을 잡고 강호의 쾌남들과 결교했으면.” 이언진은 1776년에 이런 글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는데, 공식적으로 신분제가 사라진 2020년에 읽어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으니 기이하기만 하다.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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