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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1000억 비자금' 스페인 前국왕의 해외 도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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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父 추앙받던 카를로스 前국왕, 검찰 수사대상 오르자 망명길

후안 카를로스 1세(82) 전 스페인 국왕이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거액을 받은 의혹으로 검찰 수사 대상이 되자 망명길에 올랐다. 3일(현지 시각) 후안 카를로스는 아들인 펠리페 6세 국왕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왕실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이 편지를 왕실이 공개하기 직전 후안 카를로스는 이미 국외로 떠났다. 일부 스페인 언론은 그가 카리브해의 도미니카공화국에 머물고 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2012년 열린 군 퍼레이드에 참석한 후안 카를로스 1세(가운데) 당시 국왕과 아들 펠리페 6세(왼쪽) 현 국왕 부부. 카를로스 1세는 2014년 아들에게 국왕 자리를 물려줬다. /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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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카를로스는 1975년 독재자 프랑코 장군이 사망한 지 이틀 후 즉위했다. 그는 36년간 이어진 프랑코 정권이 무너져 혼란스러운 시기에 또 다른 독재 권력의 출현을 막아 민주화의 길을 걷도록 공헌해 국부(國父)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남몰래 호화 생활을 했던 행적이 드러나며 물의를 빚자 2014년 아들 펠리페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물러났고, 검찰 수사 대상이 되면서 굴욕적으로 퇴장하는 신세가 됐다.

그를 향해 스페인 국민이 분노하기 시작한 건 2012년이다. 당시 그는 아프리카 보츠와나로 코끼리 사냥을 갔다가 엉덩이뼈가 부러지는 바람에 도중에 귀국했다. 남유럽 재정 위기로 국민이 궁핍하던 시기에 국왕이 몰래 값비싼 취미를 즐겼으며, 보츠와나에 독일인 내연녀와 함께 간 정황까지 드러났다. 당시 후안 카를로스의 둘째 사위가 왕실의 공금을 횡령한 사건까지 겹쳤다. 여론이 들끓자 후안 카를로스는 2014년 왕위를 아들에게 이양하고 물러났다.

추문에 그치지 않고 비리 의혹까지 겹쳤다. 후안 카를로스는 사우디 왕실로부터 8800만유로(약 1238억원)의 비자금을 받아 돈세탁을 거쳐 스위스의 비밀 계좌에 예치해놨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스페인·스위스 언론은 사우디 왕실이 2008년 메카와 메디나를 연결하는 67억유로(약 9조4200억원) 규모의 고속철도 사업과 관련해 후안 카를로스에게 뒷돈을 줬다고 보도했다. 사업을 수주한 스페인 컨소시엄이 매끄럽게 공사를 마친 것 등에 대한 대가로 줬다는 것이다.

논란은 후안 카를로스가 스위스에 몰래 묻어둔 재산을 인출할 수 있는 권리가 현 펠리페 국왕에게 있다는 사실이 올해 초 드러나면서 더욱 증폭됐다. 여론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펠리페 국왕은 지난 3월 아버지의 유산 상속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또한 연간 19만4000유로(약 2억7300만원)에 이르는 후안 카를로스에 대한 연금 지급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여론이 악화되는 가운데 지난 6월 스페인 대법원이 후안 카를로스의 수뢰 혐의에 대해 검찰에 수사 개시를 명령했다. 궁지에 몰린 후안 카를로스는 결국 해외 도피를 선택하게 됐다.

스페인 국왕은 재임 중 행위에 대해서는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 면책특권이 있다. 2014년 퇴임하기 이전의 행위는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스페인 검찰은 전모를 밝히더라도 후안 카를로스를 기소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가 출국한 것은 형사처벌을 피하려기보다는 국민의 시야에서 사라져 왕실의 정치적 부담을 덜기 위한 측면이 크다.

실질적인 위협은 스위스 내 비자금 사건을 2018년부터 수사 중인 스위스 검찰이 가하고 있다. 후안 카를로스는 스위스에서는 면책특권이 없기 때문에 스위스에서 기소될 가능성이 있다. 그럴 경우 스위스와 범죄인 인도조약이 체결된 국가에는 머물기 어렵게 된다.





[파리=손진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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