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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더오래]큰 병 걸렸다는 말에 남편이 메고 온 자루배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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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152)



태백 살 적, 몸이 많이 안 좋아서 집 근처 의원을 가니 큰 병원을 가보라 했다. 그 동네 가장 큰 병원에서 몇 가지 검사를 하더니 또 더 큰 병원을 가보라며 소견서를 써주었다. 며칠 동안 소견서에 적힌 영어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고, 내가 가입한 생명보험회사에서 코드번호 C계열의 병명도 알게 되었다. 53의 숫자는 자궁암 계열이었는데 의심증상이 있으니 정밀검사가 필요하다는 거였다. 그 당시 큰애가 6살 작은애가 4살 때여서 머릿속이 하얘지고, 하늘이 캄캄해진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 알았다.

내가 5살 때 친엄마가 돌아가셨으니 나도 그 유전적인 걸로 일찍 가는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부모님이 알면 얼마나 슬퍼하실까, 내가 죽고 나면 어린 내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생각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더 슬픈 건 아픔도 죄가 되는 가난한 현실이었다. 하던 일이 망해 여기까지 와서 숨어 사는 꼴인데, 병원을 간다 해도 돈은 또 어디서 구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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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의원에서 더 큰 병원에 가보라며 소견서를 써주었다. 내가 5살 때 친엄마가 돌아가셨으니 나도 그 유전적인 걸로 일찍 가는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사진 pik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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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한 남편에게 눈치 보며 말했더니,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던 그는 잠시 나갔다 오겠다며 나가서 몇 시간 후 돌아왔다. 낯선 자루배낭을 어깨에 메고 들어온 남편은 덤덤하게 나를 안아주며 호기롭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요즘 그런 암은 병도 아니다. 의사가 못 고치면 내가 조약으로도 고칠 수 있다. 나만 믿어라. 그러니 큰 병원 가서 검사나 받아보자.”

그 한마디가 얼마나 큰 힘을 주었는지 모른다. 같이 사는 사람이 그리 말해주니 별일 아닌 것 같이 기운이 났다. 남편이 메고 들어온 자루배낭은 동료에게 통째 빌린 돈 가방이었다. 천 원짜리 다발의 백만 원이란 무게는 묵직했다. 훗날, 그 친구는 부부동반으로 만날 때마다 돈 빌리러 와서 대성통곡하며 울던 남편을 놀려 먹었다. 나도 믿지 못할 통곡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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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가야 하는 길이지만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 가족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사진 pik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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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럭저럭 살다 보니 나는 할머니까지 되었고, 건강은 걱정하지 말라 큰소리치던 남편은 암에 걸렸다. 그는 “남자가 먼저 가는 것은 순서가 맞는 거다”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던 중 시어머니도 쓰러져 오랜 병환으로 교대하듯 병원에 다녔다. 그때 어머니는 남편이 먼저 죽을까 봐 또 걱정이셨다. 날마다 당신 먼저 데려가 달라 기도하셨고, 나 역시 어머님 먼저 돌아가시게 해달라는 이상한 기도를 애타게 하곤 했다. 다행히 어머니께서 일 년 앞서 돌아가셨다.

누구든 가야 하는 길이지만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 가족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그러나 내가 본 가장 큰 아픔은 어린 자식을 두고 먼저 떠나야 하는 젊은 부모와 부모를 먼저 떠나야 하는 젊은 자식들의 마음이다.

이웃 어르신이 몸져누워 계신다. 함께 밥 먹을 시간도 생기고, 자연에서 함께 농사를 지으며 노후를 보내기로 한 아들이 정년퇴직한 지 한 달 만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죽음에 이웃들도 충격이 크다. 슬픔을 못 이기고 누워계신 어르신께 따뜻한 국 한 그릇과 전 한쪽 담아 들고 가는 고마운 앞집 언니의 모습을 보며 고인들이 가 계신 하늘에 안부를 묻는다.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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