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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반응하고 변화하는 몸…‘아픈’ 몸은 ‘비정상’ 아닌 ‘다른’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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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의 의학과 서사](36)

이토 아사의 ‘기억하는 몸’이 들려주는 다양한 몸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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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공의 손과 진흙의 만남은 도자기를 만들어 낸다. 이를 위해, 도공의 손은 일상과 다른 방식으로 빚어진다. 출처: 피키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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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령이란 단어는 나쁜 의미로 사용될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아이한테 “요령 피우지 마!” 하고 외칠 땐, 아이가 잔꾀를 부리며 일을 어물쩍 넘기는 상황이겠지요. 하지만 “요령 있는 솜씨”라고 누군가의 작업을 평할 땐, 그가 일에서 꼭 필요한 부분을 빼놓지 않고 처리했음을 칭찬하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삶은 이 두 가지 의미의 요령으로 채워져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일일이 모든 것에 온 정신을 기울이면서 살 수는 없기에, 우리는 요령을 터득하고 요령을 부리며 살아갑니다. 이런 요령은 하나하나 생각하면서 하는 의식적인 것이라기보다, 그냥 무심코 행하는 무의식적인 것에 가깝습니다. 이런 무의식적인 것이 습관으로 쌓여, 몸의 기억을 만들어 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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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기억이란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예전의 이야기와는 달리 오랫동안 해보지 않았거나 접한 일이 없는 것임에도, 몸에 켜켜이 쌓여 있던 행동 방식이 앞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어릴 때 자전거를 배우고 상당히 오랫동안 자전거를 타지 못한 어른이라도, 금방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것은 몸의 기억 때문입니다.

이런 몸의 기억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사람의 경험이라는 것이 현대 사회에선 큰 차이를 보이지 않기 때문에 대동소이하다고 말해도 크게 이상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 이런 기억이 다른 이들이 있는데, 바로 장애인이지요.

비장애인의 생활 패턴에 맞춰져 설계되고 수정되어 온 세계 속에서 살아야 하는 장애인은 살아가기 위해 비장애인과 다른 요령을 터득해 갑니다. 비장애인에겐 너무도 당연한 일이 장애인에겐 버거운 일일 때가 있으며, 이들은 이를 수행하기 위해 다른 경로를 선택하지요. 예컨대, 시각장애인은 스마트폰을 소통의 보조 도구로 잘 활용합니다.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엔 시각장애인용으로 개발된 핸드폰을 사용했는데, 영 불편했다고 해요. 왜냐하면, 버튼을 눌렀을 때 들리는 키 음으로 어떤 버튼을 누르는지 아는 사람이 있어서, 문자를 보내고 있으면 옆에서 무슨 내용인지 알아챘다고 합니다. 시각적 정보에만 집중하는 비장애인은 이런 경험을 할 일이 없지요.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을 기회는 흔치 않습니다. 장애인이 이야기할 기회가 많지 않기도 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무슨 소용이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장애인이 살면서 터득한 요령이 비장애인에게도 긴요함을 알려주는 책이 있습니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객원 연구원이자 도쿄공업대학 리버럴아트 연구교육원 부교수인 이토 아사가 쓴 ‘기억하는 몸: 새겨진 기억은 어떻게 신체를 작동시키는가’인데요.[1] 이토는 장애인들을 만나 그들의 요령을 듣고 이를 통해 몸과 뇌의 작동 방식을 밝히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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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는 몸’은 장애에 반응하는 몸의 흔적을 서사에 담아낸다. 이 서사에서 장애는 그저 기능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반응하고 움직이며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출발점이 된다. 출처: 알라딘


책에 담긴 열한 개의 이야기는 인간이 어떻게 환경에 반응하기 위해 요령을 부리는지,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면서 요령을 터득하는지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회와 문화 속에서 반응하는 몸의 기록이기에 이토는 이 책을 “신체의 고고학”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몇십 년 뒤, 지금을 모르는 사람들이—혹은, 외계인이—‘기억하는 몸’을 읽는다면, 몸이 환경과 활동 사이에서 어떻게 빚어져 가는지를 파악할 수 있으리라고 믿으면서.

여러 사람의 생활사를 담았기에 책 전체를 전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여기에선 제가 인상 깊게 읽은 무용수 오마에 고이치의 이야기를 소개해 볼까 합니다. 오마에의 이야기는 없어진 다리를 통해 새로운 것을 깨닫는 삶의 모습입니다. 또한 그의 이야기는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가 말한 되기(becoming)라는, 언뜻 이해하기 어려우나 새로운 삶을 위한 힘을 담고 있는 개념을 구체적인 경험으로 보여주는 예시로 기능합니다.

다리를 절단한 무용수, ‘정상’ 무용수를 넘어서다

오마에는 프로 무용수입니다. 스물세 살 때, 교통사고로 왼쪽 다리 무릎 아래를 절단했습니다. 사고 후에도 어떻게든 꿈꾸던 노이즘 무용단에 들어가려 노력하지만, 결국 무용단에 합류할 수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2] 그는 의족을 하고 피나는 훈련을 거치며 비장애인과 같은 무용수가 되려 하지만, 오래 걸려서야 그것은 잘못된 추구였음을 깨닫습니다. 그는 의족을 벗고 춤을 추는 작품 ‘다리 없는 카나리아’를 하게 되고, 다양한 의족을 활용하면서 자신의 춤을 만들어가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그토록 떼고 싶었던 장애인 무용수라는 표현을, 동정의 눈초리를 벗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훈련의 경험이 가져온 차이를 이토는 인터뷰를 통해 파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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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다리를 절단한 무용수 오마에의 동작은 비장애인 무용수가 보여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비장애인 무용수를 ‘정상’이라고 말하고 장애인 무용수는 특정 동작에 제한이 있는 무용수라는 일반적인 통념을 넘어서, 무용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고 있다. 동영상 주소는 https://www.youtube.com/watch?v=0rquSDlqtx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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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는 몸’ 3장, ‘요령이 기능을 보완한다’에서 강조하는 것은 절단 이전과 이후의 차이입니다. 몸은 절단 이전, 두 다리를 움직이던 기억과 왼쪽 다리 절단 후, 다른 방식으로 움직여야 하는 현재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이토는 ‘하이브리드(다른 두 요소의 섞임)’라고 표현하며, 오마에의 몸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기억의 몸과 현실의 물리적인 몸, 바꾸어 말하면 예전부터 획득해놓은 ‘경험지’와 능숙하게 사용해야 하는 ‘동적 장치’가 어긋나 있는 상태입니다.” (75쪽) 표현이 조금 어려운데, 이전의 기억과 현재의 몸이 일치하지 않는 상황이라는 뜻이죠.

평상시에 몸은 의식하지 않아도 움직입니다. 걸을 때, 이번엔 오른쪽 무릎을 들고 그다음엔 아래 다리를 내밀어야지, 하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장애를 입은 몸은 이런 움직임을 하나하나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 환경이 비장애인을 기준으로 짜여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던 몸의 기억과는 달라진 몸의 작동 부분 때문이기도 합니다. 장애인이라도 이런 부분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은데, 무용수인 오마에는 세심하게 몸 각 부분의 움직임을 생각하고 단련합니다.

처음에 의족에 의존하던 그는 다리에 부담이 가지 않는 방식으로 움직이다가, 여기에서 벗어나 손상된 다리를 제대로 활용해보려 합니다. 아예 다리 전부가 없어졌으면 모르지만,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부분임에도 조심스럽게 다루기만 하다 보니 오히려 몸의 다른 부분에 부담이 더해졌기 때문입니다. 절단부의 통증을 몇 년간 견디고 근육을 발달시켜서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하려는 노력을 덧붙인 것이죠. “하지만 서른살 즈음부터 오마에는 적극적으로 왼쪽 다리를 단련해 온몸의 균형을 바꾸어내는 ‘원인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없는 부위를 없는 것으로 취급하려는 몸의 반응을 뛰어넘어 의식적으로 없는 부위를 있는 것으로 취급하고 사용해나가는 과정이었습니다.” (84~85쪽)

오마에는 절단되지 않은 오른발과 절단된 왼발을 말하며 ‘요령’과 ‘기능’을 구분합니다. 오른발은 절단되지 않았기에 많은 기능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심함은 떨어집니다. 왼발은 절단되었기에 많은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요령을 터득해 가면서, 왼발은 더 정밀해집니다. 오른발잡이였던 그는 이제 자신이 왼발잡이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매뉴얼로 제어하는 훈련을 거듭한 결과, 왼쪽 다리가 더 편하고 익숙해져서 ‘왼발잡이’가 되었습니다. 거꾸로 오른쪽 다리는 힘이 있어서 몸을 지탱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95쪽)

이런 변화를 통해, 그는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몸을 통해 표현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의 무용은 다른 사람의 것과는 동작과 접근에서 차이가 있으며, 이를 통해 그만의 모습을 만들어냅니다. 이것은 평소에는 생각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게 되는 몸의 특징을 알려주는데, 세심하게 그 동작을 가다듬고 움직여서 요령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기억이 될 때 몸은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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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에는 절단된 다리를 단련, 이제 길이가 짧거나 긴 의족을 사용하여 새로운 무용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 알펙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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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선수나 무용수에게 당연해 보이는 이런 일을, 우리는 비장애인의 관점에서 어떤 표본을 따라가는 일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예컨대 훈련을 거친 축구선수의 몸은 손흥민이나 메시의 몸을 닮았으리라 가정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 각각의 몸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며, 각자는 자신의 몸을 움직이는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내곤 한다는 것을 우린 잊어버립니다. 방금 예로 든 손흥민도, 메시도, 각자의 몸을 움직이는 요령은 매우 다르겠지요. 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오마에의 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전에 없던, 새로운 무용하는 몸의 탄생이니까요.

몸을 바라보는 두 가지 모형…표준에서 벗어나기

여기에서 몸을 바라보는 두 가지 모형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지녔던 시각, 전형이나 이상, 범주를 설정하고 그것과의 거리를 따라 몸을 평가하는 방법입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건강을 생각하기 위해 ‘건강한 몸’의 이상을 상정합니다. 예컨대 한국 남성이라면 180센티미터의 키와 75킬로그램의 몸무게, 호감형의 인상(외모를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얼굴 또한 건강의 구성요소로 들어가는 것은 이상하진 않습니다), 적당한 운동으로 단련된 근육, 멀쩡한 사지, 병원의 혈액, 소변 검사에서 평균치에 해당하는 값을 보이는 것이 건강함의 이상을 구현한 모습이겠죠. 부끄럽지만, 160센치미터 초반의 키에 70킬로그램의 몸무게, 근육이 보이지 않는 제 몸은 건강함과는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런 시각에선 몸을 관리하기 위한 노력은 이상형에 근접하기 위해 기울여집니다.

다른 하나는 오마에가 보여준 시각, 어떤 기준이나 이상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방식을 찾아가는 방법입니다. 다리를 절단한 오마에가 비장애인의 몸을 이상적인 것으로 놓고 쫓아가다 그것이 자신의 몸에 무리를 가져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자신의 몸을 사용하는 방식을 새로이 만들어내고자 합니다. 그렇게 시행착오와 훈련을 반복하며 얻어낸 오마에의 몸에서 절단 부위는 전과는 다른 역할을 합니다.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무용수로서 그는 이전과는 다른 표현 방식으로 나아가며, 다른 사람이 보여줄 수 없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데에 성공합니다.

이것은 몸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에만 국한한 것은 아니죠. 사물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모든 방식에 이 두 가지 시각의 구분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전자를 근대적 시각이라고 한다면, 후자를 현대적 시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계몽과 혁명이 놀라운 발전을 가져왔던 18세기 이후 근대 사회에서, 사람들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이상을 향한 추구였습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열망, 더 나은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은 현실에 유토피아를 구현하려 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유토피아를 상상할 수 없는 우리는 특정 사회와 그 구성원을 미화했고, 이들을 따라가기 위해 노력했지요. 예컨대, 전후 폐허가 된 한국 사회에서 그런 역할을 한 것은 미국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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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에로니무스 보스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 (1490~1510). 보스의 삼면화(三面畵)는 좌측의 낙원, 중간의 세속, 우측의 지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운데를 가득 채우고 있는 탐욕으로 왼쪽의 낙원이 오른쪽의 지옥으로 변한 것일까? 아니면 천국과 지옥이 결합한 곳이 현세인 걸까? 그도 아니면 인간은 천국으로 가려 하지만 그것이 만들어내는 것은 지옥에 가까운 건 아닐까.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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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떤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오는 것에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상으로 삼은 사회가 여기에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80년대는 그 이상향을 민족으로 바꿨으며, 그 노력의 여파는 현재 우리 사회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이런 이상향의 추구를 잘못이라고 말하긴 어려워요. 현실의 문제가 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지향점을 내세우는 것. 발생하는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이상향을 구현하는 과정에는 그에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여럿 있는데, 근대의 접근 방식은 이를 잘라 내버렸다는 것. 이를테면, 한국은 전통을 부정하고 외국의 것을 무비판적으로 들여오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내다버렸지요. 둘째, 이상향이 정말 이상향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때 답으로 설정되었던 여러 국가, 일본, 미국, 북유럽, 프랑스 등도 천국이 아님을 이젠 알게 되었습니다. 단지, 아직 잘 모르던 시절에 그들을 이상화했을 뿐.

이상을 세우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기억하는 몸’의 여러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장애인 각각은 자신의 한계를 마주해 몸을 사용하는 다른 요령을 터득하고, 이것을 기억으로 만들면서 비장애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는 삶을 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들에겐 정해진 모형이나 표준이 없습니다. 표준을 따랐다면 이들은 억지로 따라가려다 고통을 겪었을 거예요. 위에서 든 건강의 예도 마찬가지죠. 몸에 맞지 않는 운동과 식이를 통해 이상적인 모습을 쫓다 오히려 몸을 상하는 일을 주변에서 흔히 보니까요. 한국사의 예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현대사는, 맞지 않는 이상을 좇다 남은 고통의 흔적이 여기저기 깔려 있으니까요.

다시, 오마에의 방법을 다른 말로 표현해 본다면 ‘다른 몸 되기’라고 써볼 수 있습니다. 이 방식은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처한 상황에서 가능한 것들을 시도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어요. 오마에는 절단된 다리로 새로운 무용을 만들었지요. 어떤 외관이나 수치 대신 개인에게 주어지는 질병과 기능 제한이라는 과제를 자신의 방식으로 극복하는 능력을 건강이라고 정의하는 것도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어요.[4]

우리 사회가 마주하는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여러 시도를 통해 우리의 방식을 만들어내는 일, 요새 전 지구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케이(K)팝이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국면에서 성공으로 평가받는 케이방역 등 한국적인 것들의 출현 또한, 이런 접근으로 읽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위의 생각에서 하나 시사점을 찾는다면, 이런 해결책은 그 특수성에서 나온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을 다시 다른 사람이나 국가에 퍼뜨리거나, 하나의 이상이나 표준으로 삼는다면, 이전의 실수를 반복하는 일이 되겠죠.

김준혁 치과의사·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참고문헌

이토 아사. 김경원 옮김. 기억하는 몸. 현암사; 2020.

오마에 고이치. 더 자유롭게 춤추고 싶다. 일본국제문화교류재단 [Internet]. 2016년 12월 [cited at 2020년 7월 27일]. Retrieved from: https://www.tjf.or.jp/clicknippon/ko/mywayyourway/10/post-26.php.

大前光市. Alphact [Internet]. Undated [cited at Jul 28, 2020]. Retrieved from: http://alphact.jp/%E5%A4%A7%E5%89%8D%E5%85%89%E5%B8%82/.

Huber M, Knottnerus JA, Green L, et al. How should we define health? BMJ. 2011;343:d4163. doi: 10.1136/bmj.d4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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