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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그들은 주저앉지 않았다[플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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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80년 개그계에 데뷔한 이성미는 동기 중 유일한 여성이었다. 온갖 여자 역할을 도맡았다. 김지민은 “개그우먼이 왜 예쁜 척해?”란 악플에 시달렸고, 오나미는 ‘얼굴로 웃기는’ 담당이 됐다. 박나래는 ‘세다’는 평가 속에 비호감으로 낙인찍혔다. 김숙은 기획사 사장에게서 “시부모도 없고 남편도 없고 애들도 없으니 방송 나갈 데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20년 동안 꾸준히 잘나가던 송은이마저 어느날 “섭외가 제로”인 처지가 됐다.

그들은 주저앉지 않았다. 불러주지 않는 지상파 방송사를 떠나 케이블채널(MBC에브리원)에서 <무한걸스>를 시도했다. 송은이·김숙은 팟캐스트(비밀보장)를 열고, 대중의 호응을 바탕으로 직접 제작사(VIVO TV)를 세웠다. 외곽에서 생산한 콘텐츠가 인기를 얻으며 다시 지상파와 케이블 주요 채널로 진출했다. <김생민의 영수증> <밥블레스유> 등이 그것이다.

최근 KBS 출신 여성 예능인 6인의 삶을 조명한 다큐멘터리가 호평을 받았다. 지난 6월 방송된 KBS <다큐 인사이트> ‘개그우먼’ 편이다.

경향신문

KBS <다큐 인사이트> ‘개그우먼’ 편 캡처. 그래픽|이아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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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를 다큐로 받은’ 담당 PD(이은규)에게 기획 취지를 물었다. 이은규 PD는 “다큐멘터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방송에서 잘 연결해 보여주는 일”이라며 “지난해 박나래씨가 연예대상을 받았을 때 제 또래 여성들이 자기 일처럼 좋아하던 데서 착안했다”고 말했다. “특정 연예인의 성공에 왜 저렇게 기뻐할까? 개그우먼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왔고, 그들의 수상이 어떤 의미인지 공감해서일 거라는 답을 얻었다.” 그는 이후 송은이·김숙·박나래 등이 모두 KBS에서 데뷔했다는 점에 착안해 아카이브를 이용한 다큐멘터리 제작에 돌입했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흐름을 이끌어가는 프레젠터(진행자)로 김상미 예능PD가 등장한다. 이은규 PD는 “개그우먼들과 함께 커리어를 쌓아온 김 PD가 개그우먼들의 이야기를 가장 정확하게 전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고 말했다. 김 PD와 지난달 24일 전화로 인터뷰했다.



‘뚱뚱한’ ‘못생긴’ ‘예쁜’
개그우먼 역할의 오랜 고정관념
그 속에서 버텨낸 6인의 삶



-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처음 기획 취지를 들을 때부터 공감이 갔습니다.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어준다는 게 가장 좋았어요. 특히 개그우먼은 주인공보다 받쳐주는 역할을 많이 하는 편이어서 이렇게 집중적으로 조명받는 기회가 흔치 않습니다. 대중에게 잘 보이지 않던 부분을 보여줬으면 했는데, 기획 의도가 잘 담긴 것 같아서 보람을 느꼈습니다.”

김 PD는 14년 전 신인이던 박나래가 <개그콘서트>(개콘)에 출연할 때 개콘의 조연출이었다. 이제 대상 수상자와 어엿한 메인PD가 된 두 사람은 최근 코미디쇼 <스탠드업>을 함께 만들었다.

- 박나래씨와 다시 만난 감회가 남다를 듯합니다.

“14년 전 나래씨가 서울 신길동 반지하방에 살 때, 저도 별 볼 일 없는 조연출이었어요. 나래씨가 반지하에서 옥탑방으로 이사했을 땐 라면 박스 사들고 찾아가고. 곱창집에도 함께 다녔어요. 고비고비 좌절도 많았지만, 그래도 서로 ‘잘될 거야’라고 북돋아주곤 했어요. 성공한 나래씨를 볼 때 정말 기쁩니다.”



진행자로 참여한 김상미 PD
“‘여자들이…’라는 인식이 여전히 남아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주저앉지 않는,
더 깊이·섬세하게 웃음 만들었다”



- 여성 예능인의 영역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잠재력을 다 인정받지 못했지요.

“개그우먼의 역할에 대해 오랫동안 고정관념이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뚱뚱한 여성, 못생긴 여성, 예쁜 여성’ 식으로 외모 중심의 스테레오타입이 존재했어요.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여자들이 뭘 웃기기야 하겠어?’ 같은 인식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외려 여성이기 때문에 더 깊이, 섬세하게 공감하며 더 유쾌한 웃음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커졌어요. 이제 물꼬가 트였으니만큼 기회만 주어진다면 제2, 제3의 박나래가 탄생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다큐멘터리에서 박나래는 말한다. “개그를 위해서라면 이 한 몸 불사르겠습니다. 개그우먼들도 웃통을 까는 시대가 와야 합니다. 보여줄 게 아주 많습니다.”

김숙도 이야기한다. “몇 년 전만 해도 박나래씨나 안영미씨(가 지금 추는 것) 같은 춤을 추면, 얼굴을 돌리거나 편집이 됐습니다. 그런데 이젠 이상하지 않아요. 시대가 바뀌어 물을 만난 게 아니라, 그들이 시대를 바꾼 사람 아닐까요?”




김민아 선임기자 makim@khan.kr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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