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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사이언스프리즘] 기후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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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기업 상대 기후소송 봇물

국가와 정책 대상 승소 잇따라

금전 배상 요구 민사는 걸음마

기후변화 가속화… 본 게임 시작

최근 호주에서 흥미로운 소송이 시작되었다. 정부가 국채 투자자들에게 기후변화에 관한 중대한 위험을 고지하지 않은 것은 공시의무를 위반한 것이고, 정부가 그 의무를 이행할 때까지 국채의 판매를 일시 중지하는 명령을 구하는 집단소송이다. 지난해 호주 전역을 휩쓴 산불을 계기로 기획되었다고 한다.

기후소송의 방식이 질적으로 다채로워지고 있다. 런던정경대 연구소에 따르면,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제기된 기후소송은 1587건에 달해 양적으로는 이미 활발하다. 기후소송의 유형을 다양한 방식으로 분류하는 시도들이 있지만, 규제법을 활용한 행정소송의 형태, 기본권 침해를 든 헌법소송의 형태, 피해배상을 구하는 민사소송 형태, 주주 또는 소비자로서 책임을 구하는 회사법소송의 형태로 나누어 이해하는 것이 가장 간명한 듯하다. 이렇게 소송의 형태로 이해할 때 승패의 결과에 대한 트렌드도 명확히 보이는데, 행정소송이나 헌법소송의 형태의 경우 승소 사례들이 증가하고 있는 데 비해 민사소송이나 회사법소송의 형태로 금전적 배상을 구하는 경우는 아직 그 성과가 저조하다.

세계일보

지현영 사단법인 두루 변호사


헌법소송이나 행정소송 형태의 기후 소송은 환경단체와 주민들에 의해 국가 정책이 성장 일변도로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태클로서 시작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우르헨다재단이 네덜란드 정부에 헌법소송을 제기한 케이스이다. 2019년 법원은 정부가 자국민의 생명권과 사생활권을 보호할 적극적인 의무를 지며, 따라서 202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 대비 25% 감축할 것을 명하는 판결을 확정하였다. 2015년 파키스탄의 한 농부는 정부가 기후변화 대응에 실패해 자신의 생명권, 재산권 등 기본권을 침해하였다는 소송을 제기하였는데, 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파키스탄 정부에 기후변화 대응책을 세울 것을 명하였다. 2016년 매사추세츠주 연방지방법원은 청소년이 원고가 된 기후소송에서 원고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환경보호부에 “2016년 말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제한하는 규정을 발표할 것”을 명령했다. 워싱턴주 고등법원 또한 청소년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

금전적 배상을 구하는 초기의 기후소송은 주로 해수면 상승으로 삶의 터전을 잃을 위험에 처한 국가의 주민들이 다국적 석유기업 등을 상대로 책임을 묻는 형태였다. 2002년 해수면 상승으로 수몰될 위기에 처한 남태평양 섬나라 투발루가 선진국들 및 다국적 석유기업 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2008년 미국 알래스카주의 해안마을 키발리나의 주민들도 엑손모빌 등 다국적 석유기업에 대해 이주비용을 구하였다. 결과는 모두 패소였다.

정부가 기업에 소송을 거는 재미있는 케이스들도 나오고 있다. 2004년 미국 8개주 검찰이 미국 전체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10%를 차지하는 메이저 전력회사들을 상대로 벌인 지구온난화 피해소송이 최초의 사례이다. 2018년 뉴욕시장은 5개의 석유기업을 상대로 기후변화 피해복구 비용을 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시 정부가 운영 중인 연금기금으로 더 이상 화석연료기업에 투자하지 않겠다고 선포하기도 했다. 2019년에는 뉴욕주 검찰이 엑손모빌을 기후변화 영향비용 관련 분식회계 혐의로 기소한 일이 있었다. 충분한 입증을 하지 못함으로써 엑손모빌이 승소하였지만 판결선고일 주식이 1% 가까이 하락했다.

우르헨다 판결 같은 헌법소송에서 인간의 온실가스 배출로 기후변화가 가속화된다는 점은 과학적 컨센서스, 다툼없는 사실로 인정되는 반면, 금전적 손해를 구하는 민사소송의 경우 누구의 온실가스 배출로 인한 결과인가를 따지는 피해 귀속의 입증에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세계 곳곳에서 홍수, 산불, 폭염, 폭설 등 기후변화로 인해 빠르게 증가되는 손해 발생의 양상을 볼 때 결국은 누가 책임지느냐는 비용의 문제로 소송이 가속화될 것이다.

정부가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하는 것도 재난으로 인한 기반시설 재건 자금 조달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한다. 비록 현재까지는 승률이 좋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입증에 성공할 것이고 그 후로는 유사한 소송이 봇물 터지듯 줄을 잇게 될 것이다. 오늘도 일본과 중국은 홍수로, 시베리아와 미국은 산불로, 서유럽은 폭염으로 전 세계가 들끓고 있다. 이제부터 기후소송의 본 게임 시작이다.

지현영 사단법인 두루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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