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29 (수)

“가해자 읍소전략 잘 통하는 재판 구조 바뀌어야” [미투, 그 이후의 삶]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성폭력 피해자 돕는 활동가 ‘마녀’ 인터뷰

피해자로 홀로 법정 다툼한 경험 계기 10년째 같은 처지 여성 법률대응 조력

권위 내세워 피해자에 냉혹한 사법부… 전국 재판장 방청·모니터링하며 ‘압박’

세계일보

성폭력 피해자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경험을 떠올리게 만드는 상황(트리거)을 피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피해의 중심부로 뛰어들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성폭력 피해 생존자에서 비슷한 상황에 놓인 이들을 돕는 활동가로 변신한 익명의 활동가 A씨(활동명 ‘마녀’)가 그렇다. A씨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10년째 성폭력 재판 현장에서 피해자들의 실질적 버팀목이 되고 있다.

3일 세계일보가 만난 A씨는 스스로의 행로를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건조하고 냉혹한 사법 시스템하에서의 싸움이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러운지 알기 때문에 피해자를 싸움터에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며 “다행히 4년간 변호사 없이 홀로 법정다툼을 벌인 경험이 있고, 누군가를 도울 여력이 돼 실천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활동명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당하는 ‘마녀사냥’에서 따 왔다.

A씨의 일상은 대부분 전국의 성범죄 재판장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방청 연대 및 교육, 피해자 조력 등 직간접 연대 활동을 하면서 재판 방청 정보와 현장 기록을 트위터에 꼼꼼히 남긴다. 담당 판사가 본다면 뜨끔할 만한 날카로운 지적도 많다. 지난해 말엔 법원 내 젠더법연구회 판사들이 A씨를 초청해 직접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딱딱히 굳은 사법 시스템의 변화에 일조하기 위해 쉼 없이 활동 반경을 넓히고 있는 마녀에게 원동력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시스템이 변할 수 있다는 믿음, 피해자들에 대한 연대의식”이라고 답했다. 시스템도 결국 사람이 운영하는 것이니 사람이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만나는 형사재판은 여전히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에 대해 강조하면서도 정작 피해자의 말이 닿기 어려운 구조”라고 A씨는 지적했다. 성폭력 재판은 일반적으로 물적 증거보다 진술 신빙성 중심으로 진행되는데도 증인 신문 외에는 피해자의 얘기가 전달될 기회가 거의 없다. 형사재판의 당사자가 검사와 피고인이다 보니 피해자의 입장은 손쉽게 지워진다. 이로 인한 정보의 불균형, 조력을 위한 인력 미비 등으로 피해자는 재판에 참여하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은 상황이다.

세계일보

반대로 피고인 측은 공소사실을 인정하며 읍소하는 전략 등을 취하며 재판부의 이입이나 공감을 유도하기 쉬운 구조라고 A씨는 말했다. 이러다 보니 성범죄 재판 결과가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나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A씨는 “‘피해자 진술만으로 유죄, 피해자의 눈물이 유죄의 증거’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피해자에게 이입할 수 없는 현재의 형사재판 실상을 알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수많은 성폭력 재판 현장을 다닌 그는 성범죄를 대하는 사법부의 태도에 대해 “성폭력이나 피해자에 대해 이해하려 하기보다 권위를 내세워 자신들을 합리화하고 있다”며 “내부적 자정 작용을 기대하기 힘든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일반인들의 방청 연대, 재판 모니터링 등과 같은 외부 압박을 강화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A씨는 “판사들의 부족한 성인지 감수성으로 인한 문제가 반복되는 것도 이와 관련해 책임을 물을 제도가 전무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특별기획취재팀=안용성·윤지로·정지혜·박지원·배민영 기자 wisdom@segye.com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