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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사과 한 마디가 그렇게 어렵나요?” 코세기 디아나 초단 [못다 한 이야기 #ME T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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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꽃뱀몰이, 따돌림 그리고 돌아온 가해자…. 한국 사회에서 ‘미투 고발 부작용’의 대표적 사례들이다. 코세기 디아나 초단은 2018년 프로기사 전용 게시판에 올린 글 하나로 이 모든 걸 겪어야 했다. 지난달 31일 경기 성남시 분당에서 만난 그가 쏟아낸 이야기에는 “한국에 오지 말 걸, 그날 그 사람에 가지 말 걸, 바둑이 아닌 다른 운동을 할 걸…” 하는 후회가 가득했다. 코세기 초단의 조력자이자 함께 도장을 운영해 온 김승준 9단도 인터뷰에 함께했다.

─ 한국엔 언제 처음 오셨어요?

(코세기 초단. 이하 코)“1997년에 맨 처음 왔는데 그땐 시합 때문에 잠깐 있었고, 2004년에도 왔어요. 그런데 비자 문제 때문에 오래 있진 못했어요. 2005년 명지대에 들어가서 연구생으로 있으면서 프로 준비를 했죠. 입단은 2008년에 했어요.”

─ 2009년 김성룡 전9단에게 성폭행을 당하셨고, 2018년에 게시판을 통해 폭로를 하셨죠. 긴 시간 많이 힘드셨을텐데 그 사이엔 어떻게 지내셨나요?

(코) “그냥 열심히 잊으려고 했죠. 제일 친한 친구인 여자 프로기사가 있는데 그 친구한테만 그때 바로 다 이야기했고, 그리고 몇 달 후에 오빠한테 얘기하고, 외국인 친구 한 명에게도 이메일로 이야기했어요. 그 뒤로는 한명한명한테 살짝 이야기한 적 있어요. 김성룡을 마주치거나 했을 때 ‘나 저 사람 너무 싫다’ 이런 식으로요.”

─ 그러다 2018년 공개하기로 마음먹게 된 이유가 뭔가요?

(김승준 9단. 이하 김) “프로기사 게시판에 디아나가 글 올리기 1∼2주 전 한 여성 프로기사가 미투 글을 올렸어요. 고등학교 때 선배 오빠한테 성추행을 당했다. 그 오빠란 사람도 지금은 프로기사고요. 그래서 사과를 받고 싶다. 그런 내용이었어요. 그러니까 상대가 게시판에 답을 썼죠. ‘미안하다’고요. 그런데 뒤에 보면 ‘나 크게 잘못한 것 같지는 않은데’ 이런 내용이 이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여자 기사들이 나서서 비난했어요. 뭇매를 맞은 거죠. 그 사람이 다시 사과하는 걸로 그 일은 끝났어요. 그런 일이 있으니까 한국기원에서는 ‘다른 일도 있는지 알아봐라. (2018년 4월) 17일에 회의할 테니까 16일까지 알려달라’고 했죠. 그리고 디아나가 16일에 글을 올린 거예요.”

(코) “계속 고민하면서 여자 프로기사 몇 명이랑 만나서 상의하고 그랬어요. 그러다 오픈하기로 한 건, 기원이 원래 모든 일을 조용하게 해결하는 스타일이거든요. 그래서 이걸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으면 또 그냥 조용조용하게 처리할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공개해야겠다, 싶었어요.”

(김) “그런데 이걸 완전히 외부에까지 ‘미투’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그 게시판은 프로기사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죠. 그런데 디아나가 글 올린 다음날 누가 캡처를 해서 다른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거예요. 그걸 어떤 기자가 보고 기사로 쓴 거고요. 디아나가 생각 못한 대로 흘러간 거죠.”

(코) “그때가 또 미투가 많이 나올 때였잖아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건 드러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고요. 피해자들을 도와주자는 분위기가 생긴 것 같아서 ‘내 케이스는 애매한 게 없는 분명한 성폭행이었으니까 더 쉽게 사과받고 끝낼 수 있겠다’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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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투 목표가 사과받는 거였는데, 이후 가해자를 만나보기는 했나요?

(코) “글 올린 뒤로 완전히 사라졌어요. 숨어버린 거죠. 기원에도 알아보고 했는데 처음에는 모른다고 했어요. 나중에 유창혁 사무총장이랑 가해자랑 17일에 만난 걸 알게 됐어요.”

(김) “어떻게 보면, 기원의 첫 단추가 가해자의 이야기를 먼저 들은 거죠. 원래 이건 되게 쉬운 사건이에요. 2009년 당시 워딩까지 포함해 오빠(코세기 초단의 친오빠)에게 보낸 메일이 있죠. 이걸 증거로 제출했고요. 주변에도 조금씩 한 이야기가 있어 증언해줄 사람만 5∼6명 있었어요.”

─ 그런데 기원은 증거를 채택하지 않았잖아요?

(코) “제가 오빠에게 보낸 메일은 헝가리어로 돼 있으니까 번역을 해야 되잖아요? 당사자인 제가 하면 안 되니까 번역가에게 부탁을 했어요. 그리고 메일 분량이 굉장히 많았는데 그 안에는 제 프라이빗한 이야기도 적혀있었어요. 이 사건을 조사한 한국기원 윤리위원회(윤리위)에는 제가 아는 동료 프로기사도 3명 들어가거든요? 아는 사람인데 그들한테 제 사생활을 다 보여주기가 싫은 거예요. 그래서 변호사 자문 통해서 사적인 부분은 빼고 제출을 했죠. 그랬더니 ‘원문이 아니어서 안 된다, 번역한 것이라 안 된다’ 이러면서 채택을 하지 않은 거예요.”

(김) “그래서 발췌한 게 문제가 된다고 하니 다 보여주겠다. 또 번역을 믿을 수 없다고 하니 직접 이메일을 열어서 보여주겠다, 윤리위 측에서 통역을 불러라. 그리고 우리가 번역한 것과 통역가가 이야기하는 것과 바로바로 비교를 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알겠다, 필요하면 그렇게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 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 반응이 없다가 윤리위 보고서에 ‘증거로서 가치가 없어 채택을 못 한다’고 적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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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 이 밖에도 2차 가해성 질문을 해서 논란이 됐잖아요? 피해 다음날 왜 같이 바닷가에 갔느냐고 묻는다거나 옷차림에 대해 묻는다거나…

(김) “윤리위가 저희와 가해자 쪽에 질의서를 보내면 답을 보내는 형식으로 조사가 진행됐어요. 저희 쪽에서는 가해자가 뭐라고 답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죠. 1차 진술 때는 당일 일어난 일에 대해서만 썼어요. 그게 메인이니까요. 그러다 후속 진술에다 바닷가 이야기를 쓴 거예요. 왜냐하면, 가해자 쪽에서 그 부분을 먼저 악용할 줄 모르니까 우리 쪽에서 먼저 상황 설명을 해야겠다 생각한 거죠. 저희는 그날 바다에 함께 간 증인도 있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가해자 쪽에서는 ‘(피해 당일) 디아나가 옷을 입고 집에 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식으로 답을 했었더라고요. 그런데 이걸 윤리위에서 어떻게 결론내렸는 줄 아세요? ‘김성룡은 이런 정황(바닷가에 간 것)이 사실로 인정될 경우 매우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될 수 있음에도 … 같이 간 적 없다고 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김성룡의 이야기가 사실일 가능성이 높으며 디아나가 다른 사람과의 일을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다’고요. 자기한테 유리한 이야기를 안 했으니까 김성룡 말이 더 사실이란 거죠.

보고서에서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거의 소설 수준이에요. ‘바닷가에 같이 간 것이 김성룡이 아닌 다른 기사일 수 있는데 그걸 혼동할 정도라면 그 날 사건이 있었던 기억에 대해서도 신뢰를 주기 어려울 수 있다’ 이렇게 적어놨어요. 디아나가 다음 날 일을 착각했던 것일 수 있으니 전날 일도 거짓이라는 건데, 이게 도대체 무슨 논리예요?

(코) “다른 기사랑 바닷가에 갔던 것일 수 있다는 이야기는 질의응답 어디에도 나온 적이 없어요. 그런데 윤리위 보고서에 갑자기 이 말이 튀어나오고 이렇게 결론 내버려요. 같이 갔던 미국 친구도 증언하고 그랬는데 그냥 ‘디아나가 착각했어, 믿을 수 없어’가 보고서 결론이 돼버린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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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원 윤리위원회 조사확인 보고서 중에서


─ 복장에 관한 질문도 문제가 됐잖아요? 청바지를 입어서 강간이 어렵다, 이런 내용이 있었다고 기사에서 봤어요.

(김) “원래 디아나한테 온 질의서 질문은 ‘당시 복장이 어땠나요?’였어요. 저희끼리 고민했죠. 어제 입은 옷도 잘 기억 안나는데 9년 전에 어떤 옷을 입었는지 어떻게 기억해요. 그런데 문제는 그것보다도 ‘도대체 이 질문을 왜 한 거지?’였어요. ‘미니스커트나 앞이 파인 옷을 입어서 가해자의 행위를 유발했다’라고 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다른 건 기억하면서 왜 이건 기억 못 해?’라고 묻고 싶은 건지 의도를 전혀 알 수 없었죠. 디아나는 ‘기억 안 난다. 저쪽에서 뭐라고 했기에 그런 질문을 하나’ 이런 식으로 적었죠. 가해자 쪽에서 ‘디아나가 청바지를 입고 있었고, 옷 벗는 걸 도와주기까지 했다’ 이렇게 적었다는 걸 뒤에 알게됐죠. 이 내용을 갖고 윤리위는 또 어떻게 해석했는 줄 아세요? ‘청바지는 본인 의사에 반해 벗기기 쉽지 않은 옷으로서, 디아나가 탈의에 협조했다는 김성룡 측의 진술이 사실일 경우 준강간이 성립하기 어려운데 디아나는 이에 대한 진술을 하지 않고 있다’”

─ 기적의 논리네요. 김성룡 전 9단은 바둑계를 떠났나요?

(코) “유튜버로 열심히 방송하고 있어요. 구독자가 10만명이에요. 제가 좋은 길을 알려준 것 같아요. 월 3000만원을 번다는 얘기도 있고, 아무튼 프로기사일 때보다 수입이 훨씬 늘었을 거예요.”

─ 그럼 피해를 공개한 것에 대해 후회하시나요?

(코) “다시 하라면 안 할 거예요. 350명 프로기사 중에 아직도 저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제가 과연 사실이 아니었다면 왜 굳이 그런 이야기를 했겠어요. 저는 한국에서 프로도 됐고, 그 과정에서 좋은 사람들로부터 도움도 많이 받았고 그랬는데 폭로를 해서 무슨 득을 보려고 제가 글을 올렸겠어요. 전 (저보다 먼저 글을 올려 사과받은 여성 기사처럼) 사과를 받고 싶었을 뿐이에요. 이렇게 얘기했더니 윤리위원장이었던 임무영 검사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사과만 받고 싶었으면 게시판에 글은 왜 썼느냐’고요.”

(김) “김성룡 유튜브를 10만명이 본단 말이에요. 보고 있는 사람들은 사건을 어떻게 아느냐 이거예요. 어떻게 알고 있길래 이걸 보지? 이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파요.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니까 한국기원은 결국 보고서를 재작성했잖아요. 그런데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본다는 건 여전히 사건을 제대로 모르고 있거나 성폭행범이든 뭐든 상관없다 이런 거 아닐까요? 이런 게 참 아파요.”

(코) “그 사람 유튜브 방송을 틀어놓고 가르치는 도장도 있대요. 저도 유튜브랑 트위치하는데 영어로 해요. 한국말로 할 수도 있지만, 한국말로 하면 이상한 사람들이 들어와서 이상한 말을 남길까봐 아예 영어로 하고 있어요. 저는 남들이 볼까봐 페북 계정도 차단했었어요. 당연히 저를 위로해줄 줄 알았던 사람이 한 마디도 안 하는 경우도 있고… 후회하냐고 물어보셨잖아요? 복잡해요. 그냥 (공개하지 않고) 놔뒀으면 더더욱 잘못됐을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죽을 때까지 공개를 후회할 것 같단 생각도 들어요.”

(김) “윤리위에 들어간 남자기사 3명이 있었어요. 그중 둘은 디아나랑 친했고요. 그런데 그런 말도 안 되는 보고서에 사인을 했다? 증거 채택이 어렵다면 이메일도 보여주겠다 했는데 결국 기회도 주지 않았죠. 기사 악플 이런 것보다 이런 부분이 더 상처가 돼요. 그래, 보고서를 작성할 당시에는 잘 몰라서 그랬다 치자고요. 하지만 결국 재작성까지 됐잖아요. 그럼 뒤늦게라도 ‘내가 몰라서 그랬다, 미안하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거잖아요. 지금까지 아무 얘기도 없어요.”

(코) “딱 하나 후회없는 게 뭐냐면, 적어도 ‘2009년에 있었던 일, 그것 때문에 나는 너무 힘들었다’라는 걸 그 사람한테 알게 해줬다는 거, 그건 후회없네요. 제가 오픈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얘도 좋았다’ 이렇게 착각하고 얘기하고 다닐 수도 있는 거잖아요. 저는 2009년 일 이후 그 사람을 어떻게든 안 만나려고, 혹시 같은 자리에 있게 되면 눈이라도 안 마주치려고 피해다녔는데 그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와서 “안녕?” 이랬어요.”

─ 미투가 바둑계에 준 교훈이 있다면 뭐가 있을까요?

=(김) “교훈이요? 이거겠죠. 미투했더니 달달 볶였네? 미투하면 안 되겠다, 이게 교훈이에요. 더 숨게 만들었죠.”

=(코) “전 아직도 한국기원을 안 가요. 시합도 기권을 많이 했어요. 모임에도 잘 안 가고, 정상적인 생활이 아닌 거죠. 기원의 문제인지, 한국 사회가 그런지 모르겠지만 분위기 자체가 일을 크게 벌이지 않으려는 것 같아요. 일본에 갈 수 있었는데 왜 한국에 왔을까, 바둑을 안 하고 다른 운동선수가 됐더라면, 그날 그 집에 가지 말 걸, 술을 마시지 말 걸… 다 후회돼요.”

정리=윤지로 기자 kornya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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