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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현장에선] 코로나가 삼켜버린 ‘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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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줄다리기(국가무형문화재 26호)를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 지난해 서울 광화문 일대에 열린 행사에서였다. 수십 미터의 줄에 수백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촘촘하게 달라붙어 끌고 당기는 모습 자체가 장관이었지만 지금도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건 현장의 내남없는 흥이다. 줄다리기를 준비한 단체 회원들은 시민들의 참여를 독려했고, 시민들은 기꺼이 응했다.

공연자와 관객들의 직접소통으로 만들어지는 일체감, 유대감, 흥겨움을 ‘신명’이라고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우리 무형문화재의 상당수는 신명이 살아야 제대로다.

세계일보

강구열 문화체육부 차장


“코로나가 신명을 잡아먹었다.”

한 무형문화재 이수자가 기자와의 이야기 중에 한 말이다. 집합적 행사, 모임이 감염의 위험과 등치되다시피 하는 세월의 와중에 무형문화재가 처한 현실을 들려주던 중에 나온 진단이었다. ‘아무리 어려워도 전통은 계승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당위조차도 욕심처럼 보여 영산줄다리기 같은 대규모 행사는 꿈도 못 꿀 지경에 이르렀다고 했다.

어디나 그렇듯 돌파구는 ‘비대면’이다. 공연 장면, 전승 교육 등을 담은 온라인 콘텐츠를 제작, 공급하는 작업이 한층 활발해졌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하다. 하지만 온라인 콘텐츠는 신명 부재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지금 무형문화재가 처한 위기의 중대함은 이런 아쉬움조차 사치스럽다고 여겨지는 상황이라는 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얼마 전 문화재청 주최로 열린 정책토론회에서 “비대면이 일상화된 사회를 무형문화재 차원에서 번역해 본다면 ‘집단적 신명이 사라진 시대’라 할 수 있다”는 진단이 제기되자 “그렇게 보수적으로 생각해서는 위기를 벗어날 수 없다”는 반론이 나왔다. 평소 같으면 그게 할 소리냐, 타박 받기 십상일 “본질이 무엇인지를 따질 상황이냐”는 주장조차 어렵지 않게 접하는 건 심각한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코로나19가 들불같이 확산되던 시점에 비하면 나아지긴 했지만 사정은 지금도 여의치 않다. 공연이 줄줄이 취소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전수교육을 여는 것도 제한적이다. 무형문화재 유지, 계승의 핵심인 전승자들은 당장 먹고사는 걸 걱정하고 있다. 소속 단체가 없는 프리랜서는 수입이 없어진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코로나19 사태가 불러온 이런 지경이 무형문화재 분야만의 사정은 물론 아니다. 수많은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이 공통으로 겪고 있는 고통이다. 그러나 긴 세월을 어렵게 지켜왔고, 앞으로 그만큼의 시간을 견디고 이어가야 할 전통이어서 그 각별함과 무거움을 곱씹어 볼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사태가 아니더라도 무형문화재는 전승 자체가 위협받을 정도로 상황이 나빴던지라 더욱 그렇다. 이미 맥이 끊어진 것이 있다고 하고, 앞날을 전망하기 힘든 무형문화재 종목이 적지 않다.

당장 뾰족한 해결책을 내놓기는 힘든 것 같다. 다만 무형문화재가 처한 위기의 내용을 직시하는 것이 이 시간을 견뎌내는 출발점인 건 분명한 듯 보인다. 이런 관심과 공감이 수많은 위기를 극복하며 긴 시간을 살아낸 뒤 전통이란 타이틀을 획득한 무형문화재의 저력과 결합할 때 비로소 위기는 기회가 될 것이라 믿는다.

강구열 문화체육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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