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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어학당 여성 강사들의 노동과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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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코리안 티처’ 책으로 나와

한겨레

코리안 티처

서수진 지음/한겨레출판·1만3800원



제2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서수진 소설 <코리안 티처>는 대학의 한국어학당에서 일하는 여성 강사 네사람의 이야기다. 외국인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이들이 얼핏 우아해 보이는 이면에서 어떤 노동과 투쟁을 감당해야 하는지를, 작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실감나게 그려 보인다. 고학력 여성들이 등장해, 노동자로서만이 아니라 여성으로서 겪는 어려움과 제약 역시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노동소설이자 여성소설이기도 하다.

소설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학기와 겨울 단기과정까지 다섯 장으로 이루어졌다. 학기별로 선이, 미주, 가은, 한희 네 강사의 시점을 택했고, 선이의 시점으로 돌아간 마지막 단기과정은 분량도 짧아서 일종의 에필로그로 구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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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코리안 티처>로 제25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서수진 작가가 자신이 그린 그림 옆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는 한겨레출판이 마련한 동영상 인터뷰에서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무릎을 꿇고 엉엉 울었다”며 “간절해지는 순간에 대해서 쓴 진심이 통한 것 같다”고 소감을 말했다. 서수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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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우선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주인공들이 불안정 고용 상태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첫 장에서 어학당 신입 강사인 선이는 베트남 학생 꽌이 자신의 수업 사진을 에스엔에스 계정에 올려 놓은 것을 보게 된다. 사진 아래에는 ‘코리안 티처’를 비롯해 여러 해시태그가 달렸는데, 그 가운데에는 ‘코리안 핫 걸’이라는 표현도 있고 지저분한 댓글과 사진이 그에 따라붙었다. 선이는 같은 일을 당한 강사들과 함께 경찰서에 찾아가지만, 그들과는 달리 마지막 순간에 신고를 포기한다. ‘그래, 내가 선택하는 거야. 나는 여기 남을 거야.’ 그에게는 경찰에 신고하는 것과 어학당에 계속 남아 있는 일이 양자택일의 문제였다.

선이에게 신고 포기를 종용한 이는 초급 베트남반 책임 강사인 한희. 연륜과 경험을 인정받아 ‘책임 강사’ 자리에 올랐지만, 그것이 그의 일을 덜어주거나 장래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한희는 지나치게 열심히 했다. 가장 일찍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했다.” 그가 일 중독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신분의 불안정 때문이었고,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책임 강사로 2년을 일했고, 겨울 학기 이후 재계약을 앞두고 있었다. 이번에 계약 연장을 한다는 건 무기계약직이 된다는 거였다. 학교에서는 계약 연장을 안 하려고 할 것이다.”

선이가 강사직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어학당에서 200명이 넘는 베트남 학생을 한꺼번에 유치한 덕택이었다. 대기업 재무부장 출신인 원장은 학생을 소비자로 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육도 서비스입니다. 학생들이 돈을 내고, 여러분은 그 돈으로 일자리가 보장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학생은 갑이고 여러분이 을입니다.” 학생들은 지각했음에도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강의실에 입장하고, 수업 중에 게임을 하거나 문자를 주고받으며, 한국어 말하기 시간에 자기네 말로 떠들기도 한다. 자신이 갑인 것을 너무도 잘 아는 것이다.

‘3개월 계약직 시간강사’라는 신분 불안정에 여성의 취약하고 불리한 처지가 곁들여진다. 가은은 자신이 가르쳤던 일본 학생 유토와 연애를 한 일이 나쁜 소문으로 돌아다니고 잠자리 동영상이 유출되었다는 익명의 제보까지 받게 된다. 동거하는 영국 남자 제이콥의 아이를 임신한 한희는 어학당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조산의 위험조차 무릅쓰려 한다.

외국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이들의 이야기인 만큼, 한국어를 타자의 눈으로 낯설게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가령 ‘저는 작년에 중국을 갔습니다’라는 문장을 보자. 문법대로라면 ‘중국에’ 갔다고 써야 맞지만, 현실에서는 ‘중국을’ 갔다고 쓰고 말하는 한국인들도 적지 않다. 강사들 사이에 이 표현을 틀린 것으로 할지 맞는 것으로 할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고 결국은 조사 오류로 감점하기로 한다. 비슷한 예가 ‘날씨가 추웠어서’라는 표현이다. 문법적으로 틀린 표현이지만 인터넷 포털에서는 이런 표현을 부지기수로 찾을 수 있다.

한희는 학회지에 발표할 생각으로 ‘한국어에는 미래시제가 없다’는 논문을 쓰고 있다. ‘~ㄹ 것이다’와 ‘~겠’을 한국어의 미래시제 표현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따져 보면 이 둘은 각각 추측 양태와 의지 양태에 해당한다. “한국어에서 미래는 의지로, 추측으로 존재한다. (…) 한국어의 미래는 시간을 말하고 있지 않다. 미래는 한없이 개인적인 의지에 기생해 존재하고, 언제나 틀릴 가능성을 포함한 추측 속에서 떠돈다.” 인용한 문장들은 한국어에 대한 작가의 깊은 고민과 아울러 그의 능란한 한국어 장악력 역시 보여준다.

한희에게 미래시제에 관한 궁리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곧바로 이어진다. 그에게는 뱃속의 아이가 무엇보다 확실한 미래인데, 그 아이와 아이 아버지와 함께 꾸려갈 앞으로의 삶은 불확실하고 막막하기만 하다. 그의 미래는 그야말로 한희의 “한없이 개인적인 의지에 기생해 존재하고, 언제나 틀릴 가능성을 포함한 추측 속에서 떠돈다.”

학생들이 강사들의 사진을 에스엔에스에 올린 일을 경찰에 신고한 것 때문에(선이 자신은 신고를 포기했음에도) 강사 자리에서 잘렸던 선이는 불법체류 노동자가 된 베트남 학생들의 빈 자리를 채우고자 ‘모셔온’ 중국 학생들을 위한 단기과정 강사로 다시 위촉된다. 마지막 장에서 그가 중국 학생들과 함께 맞는 파국은 일회적이거나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적어도 <코리안 티처> 속 한국어학당에 누적되어 온 문제가 폭발적으로 분출된 결과라 보아야 할 것이다.

코로나 사태 여파로 올해 한겨레문학상 시상식은 열리지 못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지내는 작가는 한겨레출판이 마련한 동영상 인터뷰에서 “이 소설은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고자 고군분투하는 네 명의 여자들 이야기”라며 “항상 읽히기를 바라면서 소설을 써왔고, 진짜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누군가 읽어주기를 바랐다”고 수상과 출간 소감을 밝혔다.

(※유튜브에서 검색어 ‘한겨레문학상’을 치시면 동영상 인터뷰를 볼 수 있습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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