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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임용한 박사의 ‘당신이 모르는 三國志’] 낙양에 부는 바람-외척과 환관의 다툼이 불러온 나비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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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년 한나라 황제 영제가 사망하자 조정은 내란 직전 상황으로 치달았다. 영제와 아버지 환제는 대를 이은 바람둥이였다. 그들은 몇 번의 결혼으로 외척 세력을 분열시켰고 황위 계승도 불분명하게 처리해 놨다.

영제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하태후의 아들 유변과 왕미인이란 후궁에게서 낳은 유협이다. 왕미인은 하태후에게 독살 당했다고 전해지는데 영제의 친모인 동태후가 유협을 거둬서 키웠다. 하태후와 동태후는 모두 태후지만 정치적 배경이 전혀 다르다.

한나라는 항상 외척이 강했다. 황가와 외척의 동맹이 권력 중추고 그 사이에 환관이 끼어 있었다. 외척들은 싸움과 화해를 반복한 끝에 외척가문 간 동맹을 맺으며 일종의 카르텔을 형성했다. 이 카르텔이 위험해 보였을까. 영제는 돌연히 백정의 딸을 황후로 받아들인다. 그녀가 하태후다. 두 태후는 각자 왕자를 끼고 집안의 후원자가 된다.

영제는 주변 사람을 싸우게 만들고 견제하면서 자신을 보호하는 스타일이었다. 모든 정치권력이 그럴 수 있지만 그것밖에 못한다는 것이 영제의 문제였다. 그는 죽을 때까지 황위 계승자를 분명히 정하지 않고 두 아들을 인질로 정치세력의 대립을 조장했다.

매경이코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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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제 사망 후 분열되는 조정

▷하태후 아들이 즉위했지만…

황건적의 난을 거치면서 황궁과 수도를 방어하는 금군이 강화됐다.

영제는 군사 권력을 배분하는 일 또한 애매하게 처리했다. 군사권을 환관 세력의 핵심이었던 ‘건식’과 외척의 중심이었던 ‘하진(하태후의 오빠)’에게 나눠줬다. 서로 견제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황제 개인으로서는 멋진 아이디어라고 생각했겠지만 국가적으로 보면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당시 금군은 ‘서원 8교위’라는 강력한 부대를 중심으로 운영됐다. 이때 교위로 임명된 대표적인 인물이 원소, 조조 등이다.

건식과 하진의 권력 다툼 또한 초반부에는 건식의 승리로 돌아가는 듯했다. 황제가 하진에게 건식의 명령을 받도록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식이 완전한 힘의 우위를 지닌 것은 아니었다. 원소와 조조 역시 집안은 환관 세력과 가까웠지만 두 사람은 환관의 횡포에 불만이 컸다.

그러던 중 영제는 후사를 명확히 정하지 않고 사망했다.

영제가 죽자 후계자를 놓고 하진과 건식의 대립이 극에 달한다. 하진은 하태후의 아들 ‘유변’, 건식은 둘째 아들인 ‘유협’을 끼고 대립했다. 이 싸움에서 결국 승리한 쪽은 하진이었다. 하태후 아들인 유변(소제)이 즉위하고 하태후는 섭정을 맡았다. 하태후는 섭정을 맡자마자 동태후의 아버지 동중을 살해하고 동태후를 궁궐에서 몰아냈다. 동태후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하진과의 권력 쟁탈전에서 힘을 잃은 건식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하진을 제거해야만 했다. 그는 다른 환관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하진 암살 계획을 세웠다. 현재 관점에서 보면 환관들이 일치단결해 하진과 싸웠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후한 말 어지러운 조정 속에서 환관 중 열 명의 지도자를 ‘십상시’라 불렀다. 이는 환관들이 집단체제로 운영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단체제가 필요한 이유는 조정에 포진한 여러 세력과 복잡한 네트워크를 맺고 관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권력의 계승 관계가 불명확해지면 환관은 분열된다. 중앙에서 여러 파벌로 파견해 놓은 환관 브로커들이 각각 자신들의 파벌 편에 서기 때문이다. 건식의 음모는 바로 이 구조에 의해 파멸됐다. 하진 측 연결망이었던 한 환관(그는 하진과 동향이었다고 한다)이 건식의 음모를 누설했다. 하진은 건식을 즉각 살해하고 그가 관장하던 군대까지 손아귀에 쥔다. 그렇게 수도 낙양의 군대는 모두 하진 품으로 들어왔다.

이때 하진의 유력한 조력자가 바로 원소였다. 하진이 건식을 제거하자마자 원소는 이 기회에 남은 환관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고 건의한다. 하진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하태후를 만나 환관 제거를 건의했지만 하태후는 더 망설였다. 하태후가 환관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왕미인을 독살한 일이 영제에게 발각되자 영제는 분노하고 하태후를 폐위하려고 했다. 이때 환관들이 말려서 폐위를 면했다.

그러나 하태후가 환관 제거를 꺼린 진짜 이유는 앞서 말한 환관들의 존재방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태후 입장에서 보면 환관은 유용한 존재였다. 환관을 자르면 자신의 손발이 잘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을 테다.

▶혼란으로 치닫는 후한 말

▷환관 제거 위해 늑대를 불러들이다

후한 역사 내내 이처럼 외척과 환관은 서로 물고 뜯고 싸워왔지만 관료나 지방호족 입장에서 보면 외척과 환관은 모두 공공의 적이었다.

한나라 조정은 188년 계속되는 봉기와 치안 부재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지방 민정과 군정을 통합했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군웅의 상당수가 한 지역을 장악한 태수 출신이었던 것은 이런 배경 덕분이다. 비상시국이라 어쩔 수 없는 조치였지만 한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없는 야심가 원소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이 조치를 내린 후 1년 만에 영제가 사망했다. 국가는 행정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네트워크다. 하지만 당시 네트워크는 황실과 수도 낙양은 고립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만큼 지방 호족 힘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낙양의 군대와 정권을 장악해도 지방 호족으로부터 지지를 잃는다면 그 권력은 바람 앞의 등불이다.

원소 입장에서 환관 대숙청은 중앙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방법인 동시에 청류파(당시 지식인 그룹으로 원소가 대표적 인물) 인사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특히 166년 당고의 난 이후 청류파 인사들은 20년 넘게 환관에게 시달렸다. 이 과정에서 지방으로 숨어든 청류파는 지방의 사대부, 호족과 인맥을 맺었다. 지방 호족들은 황건적 덕분에 무장이 가능해졌고 당고의 화로 중앙관료 출신인 청류파 인맥을 얻었다. 원소는 환관 숙청을 한다면 이들의 인망을 한 몸에 얻을 수 있다고 계산했다.

다만 원소 입장에서 독단적으로 환관을 제거하는 것은 황제에 대한 반역이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하진에게 주청해 환관을 제거하고자 했던 것이다.

원소를 평생 괴롭힌 단점이 있다. 머리는 좋은데 생각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그 특징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발휘된다. 원소의 주장에도 하진은 환관 제거를 망설인다. 그러자 원소는 하진에게 낙양 근교에서 소요를 일으키거나 유언비어를 퍼트린 다음 지방 군벌을 낙양으로 불러올리자고 건의한다. 자기에게 주어질 부담을 나누고 더 안전한 군사력을 확보하자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올바른 결정은 아니었다. 복잡한 상황에서 결단을 내릴 때, 사람들은 합리성과 비합리성을 기준으로 여러 가능성을 분류하는 경향이 있다. 많은 리더가 합리적 가능성을 모두 바구니에 담아 넣고 섞어 흔든다. 리더의 선택을 오도하는 요인은 비합리적 추론이 아니라 합리적인 걱정이다. 진정한 승부사는 사방에 널려 있는 합리적인 덫을 걱정하기보다는 목표를 향한 가장 빠른 길을 탐구한다.

원소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자기 자신과 하진, 수도 낙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치명적인 악수가 된다. 훗날 전한을 무너뜨린 왕망과 비교될 만큼 역적으로 분류되는 동탁의 출현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매경이코노미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70호 (2020.08.05~08.1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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