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04 (토)

이정재-황정민 ‘캐릭터 스와프’…뭐지, 이 신기한 설득력은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신세계’ 이후 7년 만에 호흡

‘백정’ 이정재가 쫓는 황정민

캐릭터 풀어가는 ‘경제적’ 묘사

‘퉁치기’ 아닌 전략으로 기능

속도감과 극단적 슬로모션 공존

인상적 추격액션이 서사 떠받쳐


한겨레

앞으로는 ‘장기밀매조직이 딸에게 손을 대기 전에’라는 절박한 시한을 쫓아야 하고, 뒤로는 ‘무적무패의 도륙자 레이(이정재)의 추격’을 따돌려야 하는 사면초가에 주인공 인남(황정민)은 갇힌다. 씨제이(CJ)엔터테인먼트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조로아스터교부터 무교까지, 종교를 떠나 의무교육 이수한 자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을 법한 기도문의 한 구절을 끌어옴으로써, 뭔가 인간의 원죄와 구원에 관한 통찰까지도 머금고 있을 듯 기대감을 건드리는 제목이 상당히 있어 보이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일단 당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삶에 대한 염증에 절어 일본에서 청부암살자 생활을 하고 있는 전직 비밀요원 ‘인남’(황정민)은 악랄한 야쿠자 보스를 죽이는 일을 끝낸 뒤 ‘최후의 안식처’ 파나마로 떠나려 한다. 그런데 인남이 죽인 야쿠자의 동생 ‘레이’(이정재)는 ‘백정’이라는 별명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잔혹악랄한(그리고 살상능력 또한 탁월한) 야쿠자였던바, 그는 그다지 친하지도 않던 형의 죽음에 분개해 인남을 추격하기 시작한다.(이하 가벼운 스포일러 있습니다) 한편 인남은 옛 애인(최희서)의 사망 소식에 태국(타이)으로 날아가는데 죽은 애인과 자신 사이에 딸이 있었고 그 딸이 태국 장기밀매조직에 끌려갔음을 알게 되어 즉각 납치범 추격에 들어간다. 레이는 그런 인남을 추격하고, 태국 조폭들은 자신들의 구역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두 사람을 추격한다.

_____________

딸이 끌려갔다, 태국 장기밀매조직에


<칼리토>를 위시하여 <글로리아>(1980), <레옹>, <히트> 등등의 영화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위 줄거리에 ‘추격’이 등장하는 빈도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하겠지만, 영화는 추격액션임을 명백하게 표방하고 들어간다. 게다가 영화는 ①인남의 딸 납치범 추격, 그리고 ②레이의 인남 추격(이라기보다는 사냥)이라는 이중 추격의 형국을 취하고 있다. 이를 주인공 인남 쪽의 입장만 떼어놓고 본다면, 앞으로는 ‘장기밀매조직이 딸에게 손을 대기 전에’라는 절박한 시한을 쫓아야 하고, 뒤로는 ‘무적무패의 도륙자 레이의 추격’을 따돌려야 하는, 앞에서 끌고 뒤에서 미는 형국인바 <다만 악…>의 추격전은 두 개의 동력장치를 장착하고 있다 할 것이다.

여기에 황정민-이정재 두 배우의 ‘캐릭터 스와프’도 <다만 악…>이 보유한 재미있는 설정 중 하나다. 사실 2013년 <신세계> 이후 7년 만에 황정민-이정재 두 배우의 조합이 다시 성사되었다는 점은, 떼좀비와 떼잠수함만큼이나 관객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한 요소일 것인데, 거기에서 한 점 더 나아가 두 배우가 <신세계>에서 연기했던 캐릭터를 거의 서로 맞바꾸는 듯한 형국의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검은 정장과 흰 셔츠를 흡사 유니폼인 듯 내내 입고 있는 ‘인남’과, 가상현실(VR) 헤드셋을 방불케 하는 선글라스와 그에 못잖게 화려한 순백의 롱코트(그것은 <영웅본색>의 ‘아성’ 캐릭터를 곧바로 떠올리게 한다) 및 하와이안 호피무늬라 명명될 법한 한국 조폭 고유의 화려한 패턴이 프린트된 셔츠를 입은 채 액션하는 ‘레이’만 봐도 능히 짐작된다.

자, 그러니까 크게 보아 <다만 악…>의 가장 핵심적인 두 축은 ①추격액션의 속도감과 ②캐스팅 및 캐릭터의 힘, 이 두 가지일 텐데, 결과부터 말하면 이 양대 축은 기대된 바 기능성을 충분히 발휘해주고 있다.

<추격자>, <황해>, <내가 살인범이다> 등등의 영화를 각색해온 경력을 가진 홍원찬 감독이 쓴 오리지널 시나리오는 추격액션의 속도감을 떨어뜨리는 요소들을 최대한 쳐내고 효과적으로 압축하고 있다. 비밀요원이었던 인남의 현재와 과거, 옛 애인과의 지난날, 그녀가 인남의 아이를 낳고 방콕에 가게 된 사연, 레이의 개인사 등등은 아예 생략돼 있거나 한 장면이나 대사 몇 줄로 제시되고 끝난다. 예컨대 인남의 공허와 고독은 가구 한 점 없는 어두운 방에 웅크리고 누운 인남의 모습으로, 레이가 ‘백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소싯적 사연은 도륙당할 사람을 묶어놓고 읊조리는 대사로 표현되고 등등.

그 정도로 되는가? 된다. 추격액션에 시동을 걸고 그 추력을 유지하는 데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야말로 <다만 악…>이 선보인 가장 신묘한 기술일 것이다.

한겨레

씨제이(CJ)엔터테인먼트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사실 인남이 방콕까지 가서 위험을 무릅쓰고 굳이 방콕 조폭의 구역을 뒤지고 다니는 상황이 납득되려면, 옛 애인에 대한 인남의 애정이 관객들에게 충분히 설득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자신의 안위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진행 방향에 있는 모든 인마를 살상하면서 악착같이 인남을 추격해 죽이려 하는 레이가 납득되려면, 그 과잉행동에 상응하는 분노나 절박한 이유가 사전에 설득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영화는 ①인남에 대해서는 혈육(딸)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관계로 이 설득과정을 ‘퉁친다’. 지구상의 수많은 장르영화들이 그러하듯이. 더구나 처음에는 인남의 위험한 추격은 살아 있는 딸을 찾기 위한 것도 아니라, ‘딸의 시신이라도’ 찾기 위한 것이었다. 영화는 그 동기로서 삶의 목적이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인남의 공허감을 제시해둔 상태고 말이다.(그러니까 인남의 딸은 곧 제목이 논하는 ‘구원’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②레이의 악귀 그 자체 같은 추격 열정의 원인에 대해서는 필자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에서 가장 납득되지 않았던 대목이었는데, 영화 스스로도 ‘이건 좀…’ 싶었던지 (이하 스포일러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대사 한마디를 투입해 이를 해명하고 있다.

태국 조폭 보스: 왜 그렇게 그놈(인남)을 원하지?

레이: 나도 기억이 안 나네….

보통 이런 대사를 접하는 순간 영화에 대한 신뢰감 일체를 상실하며 배를 버리고 극장을 탈출하고 싶어지기 마련인데, <다만 악…>의 경우 오히려 캐릭터에 대한 경제적인 묘사로 받아들여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는 인남의 행동 동기로 혈육(그것도 딸. 그것도 어린. 게다가 난생처음 보는)이라는 감정장치를 설정한 영화의 선택이 ‘안이한 퉁치기’보다는, 오히려 ‘구원’이라는 주제를 드러내는 장치로 보이는 현상에서도 마찬가지다.

_____________

악인 수명 30년 단축시킨 막판 수다


이런 신기한 설득력은 어디에서 생기는가? 장르의 작동 방식에 충실한 시나리오, 너무 잘게 쳐지지 않은 컷으로 육탄감과 리듬감을 공존시키고 있는 액션 장면(특히 초고속촬영=극단적 슬로모션 장면들이 남기는 인상은 매우 강하다) 등등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배우들의 연기와 존재감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겠다. 황정민-이정재 두 배우의 연기는 <신세계>에서보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서로 더 잘 맞는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물론 <신세계>가 이 영화보다 나중에 나왔더라면 그에 대해서도 역시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지만)

거기에 인남의 유일한 조력자이자 영화의 유일한 윤활유인 트랜스젠더 ‘유이’ 역을 연기한 박정민은, 그의 출연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관람한다면 박정민임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다. 너무 누르면 시종 쇳소리만 가득한 뻑뻑한 영화가 되었을 것이고, 반대로 너무 과해지면 전체의 결을 해치며 따로 놀았을 이 캐릭터는 박정민의 명민한 연기 덕분에 적절한 밸런스를 유지한 채 ‘트랜스젠더’라는 전형의 수면 위로 그 아래에 잠겨 있는 ‘사람’을 슬쩍 밀어 올리는 데까지 나아간다.

지면 관계로 자세히 논하지는 못하겠지만, 종종 크리스토퍼 도일이 촬영한 왕가위(왕자웨이) 감독의 대표작들을 언뜻언뜻 떠올리게 하면서도 자신만의 시각적 지문을 뚜렷하게 남기는(예컨대 ‘인천 부두의 마지막 석양’ 장면이라든지, ‘뒷골목을 나서는 인남 부녀의 실루엣’ 장면) 홍경표 촬영감독의 촬영, 그리고 정서와 긴박감을 동시에 끌어올리는 모그의 음악 또한 이 영화의 설득력을 만들어내는, 못지않게 핵심적인 성분이겠다.

물론 흠도 많다. 앞서도 말했듯 주인공들이 차츰 방탄화 현상을 보이기 시작하는 중반(빗발치는 모든 총알이 피해 간다), 그리고 본격 불사 좀비화 현상을 보이는 후반(총상도 자상도 수류탄 폭발도 모두 무위로 돌린다)으로 넘어가면서 영화는 초반의 밀도를 상당 부분 상실한다.(이하 스포일러 있습니다) 특히 차창 앞유리에 거대 구멍을 만든 뒤 그 안으로 날아 들어가는 슬로모션은 그 자체로는 매우 기발무쌍한 결정타적 장면이었으나, 전체적으로 묵직한 영화의 톤에서 미루어볼 때 과유불급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또 장기밀매용 아동들을 감금한 장소는, 주인공들을 위한 액션의 장을 열어주기 위함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으나, 그래도 명색이 조폭들의 핵심 시설물인데 지키는 자 거의 없이 너무 무주공산스럽다. 종종 주인공들의 운명의 향방을 가를 정도의 핵심 아이템으로 거듭나는 수류탄이 자아내는 은밀한 코믹함은 물론이려니와, 무엇보다도 이런 탄식을 끝내 피할 수 없다. 전세계 나쁜 놈들의 평균수명을 최소한 30년은 단축시킨 막판 수다의 오류는 대체 언제가 되어야 종식될 것인가….

하지만 이런 흠들조차 즐길 수 있게 할 만큼 <다만 악…>의 장르적 흡인력은 강하다. 그런 강력한 속도감을 극장에서 맛본 것이 언제인가 싶다. 감독의 다음 작품이 궁금해지는 영화를 보게 된 것 또한 꽤 오랜만이다.

그만하면 충분하지 싶다. 코로나와 폭우와 폭염이 지배하는 이 엄혹한 시국이라면. 대단한 영화적 구원씩이나 되지 않아도 좋다.



한동원 영화평론가. 병아리감별사 업무의 핵심이 병아리 암수의 엄정한 구분에 있듯, 영화감별사(평론가도 비평가도 아닌 감별사)의 업무의 핵심은 그래서 영화를 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에 대한 엄정한 판별 기준을 독자들께 제공함에 있다는 것이 이 코너의 애초 취지입니다. 뭐, 제목이나 취지나 호칭 같은 것이야 어찌 되었든, 독자 여러분의 즐거운 영화보기에 극미량이나마 보탬이 되자는 생각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언론, 한겨레 구독하세요!
▶네이버 채널 한겨레21 구독▶2005년 이전 <한겨레> 기사 보기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