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조용수의 코드클리어(52)
심정지 환자의 정상 생활 복귀는 쓰러진 직후 몇 분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병원 치료는 그야말로 새 발의 피. 대개 응급실 문턱을 들어섰을 때 이미 치료 성패가 결정되어 있다. 심장이 멎었을 때 누군가 즉시 심폐소생술을 해주면?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제발 저희 어머니 좀 살려주세요.” 안타까운 마음에 어떻게든 해주고 싶지만 나라고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다. 의사라고 죽어버린 사람을 살려낼 방법은 없으니까. 병원에 도착하고 나면 이미 늦다. 집에서 쓰러졌을 때, 그때가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이 그 소중한 시간을 우왕좌왕하느라 잃어버린다. 경황없고, 당황해서. 이러면 내가 할 말은 하나 뿐이다. “소생 가능성이 없습니다. 사망 선고하겠습니다.”
병원에서 의사는 심폐소생술을 얼마나 오래 계속할까? 물론 그때그때 다르다. 환자의 상태를 보고 결정하니까. 쓰러진 직후부터 심폐소생술이 잘 되어 생명징후가 조금이라도 포착된다면? 조금 더 끌고 간다. 하지만 심장이 멎은 지 오래 지나 이미 시체와 다를 바 없다면? 보자마자 중단해버리기도 한다. 관례적으로는 보통 30분이다. 보호자가 죽음을 받아들이는데 이 정도 시간은 필요하니까. 통상 30분이 지나면 다시 심장이 뛰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도 하고. 설령 뒤늦게 심장이 뛰더라도 대부분 뇌사나 식물인간이 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30분 이상 심폐소생술을 계속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친구 아버지가 복통으로 동네 응급실을 갔는데, 진료 도중 쓰러져 심폐소생술을 받고 있다가 내가 있는 대학병원으로 왔다. 심폐소생술을 받은지 40분이 지났다고 해서 처음엔 어렵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사진 pexels] |
얼마 전 일이다. 저녁 시간에 전화벨이 울렸다. 의대에서 함께 공부해서 정형외과 의사가 된 친구였다. 오랜만의 연락인데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그는 두서없이 말을 꺼냈다. 아버지가 복통으로 동네 응급실을 갔는데, 진료 도중 쓰러져 심폐소생술을 받고 있다고 했다. 이미 40분이 지났다고도 했다.‘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윽고 그는 내가 있는 대학병원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오겠다고 했다. 40분째 심폐소생술 중인 환자를 이쪽으로 옮기겠다고? 차로 30분이나 걸리는 거리인데? 이송 중에는 심폐소생술도 제대로 안 될 거고. 아무리 생각해도 무모한 결정이었다. 본인도 의사라서 상황을 잘 알 텐데. 아버지 일이라 너무 당황해서 정상적인 판단이 어려운 건가?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게 환자는 쓰러진 지 90여 분 만에 우리 병원에 도착했고, 응급실에서 8분간 더 심폐소생술을 받은 후 심장이 돌아왔다. 하지만 총 1시간 40분이나 심폐소생술을 받았으니, 흔히 말하는 골든타임을 몇 바퀴나 지나버린 상태였다. 환자의 갈비뼈는 멀쩡히 붙어 있는 게 드물었는데, 그만큼 긴 시간 심폐소생술을 받았음을 뜻했다. 아무런 꿈도 희망도 기대할 수 없었다. 절망적인 상태일 게 뻔했으니까. 그게 상식이었다.
생명징후가 조금이라도 포착된다면 심폐소생술을 조금 더 끌고 가지만, 심장이 멎은 지 오래 지나 이미 시체와 다를 바 없다면 보자마자 중단해버리기도 한다. 사진은 SBS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2' 중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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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무언가 위화감이 들었다. 심정지 시간이 긴 환자가 보이는 특유의 모습, 경험 많은 응급의학과 의사들은 알 수 있는, 비유하자면 환자에게서 죽음의 향기가 전혀 나지 않았다. 설마 하면서 뇌파를 측정했는데, 놀랍게도 살아있는 신호가 잡혔다. ‘어라? 이거 어쩌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급하게 중환자실로 환자를 옮겨 집중치료를 했다. 막힌 심장혈관을 뚫었고 투석기를 달았으며 뇌 손상을 줄이기 위한 목표체온 유지치료를 시작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단 이틀 만에 환자는 의식을 완전히 되찾았다. 지금껏 셀 수 없이 많은 심정지 환자를 치료했지만, 이렇게 장시간 심장이 멎고도 이렇게 빠른 시간에 이렇게 온전히 깨어난 사람은 처음이었다. 친구는 생명의 은인이라며 연신 고맙다고 인사했는데, 나는 그 인사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답했다. 솔직히 내가 한 게 아무것도 없다고. 환자가 스스로 이겨낸 거지 결코 내가 살린 게 아니라고. 그래도 그는 마냥 나에게 공치사를 돌렸다. 낯이 뜨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살린 게 아냐. 병원에서 심장이 멎은 게 행운이었지. 보통 그런 상황이면, 걸어 들어갔는데 죽어서 나왔다며 욕하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병원에서 쓰러진 덕에 1초도 지체 없이 심폐소생술이 시작된 거잖아?”
“그리고 아들이 의사라는 게 큰 도움이 됐지. 네가 심폐소생술을 열심히 했잖아. 보통 이송 중에는 심폐소생술이 잘 안되거든. 응급구조사 혼자 흔들리는 차 안에서 제대로 심폐소생술을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그런데 아들인 네가 있어서 이송 중에 심폐소생술을 같이 할 수 있었잖아. 아버지 목숨이 걸렸으니 오죽이나 열심히 했겠어?”
“사람이 쓰러지면 중간 중간 정말로 많은 시간이 사라지더라. 신고 중에, 이송 중에, 인계 중에, 경황없는 중에. 이렇게 저렇게 심폐소생술이 끊긴 시간을 다 합하면 결코 적은 시간이 아니거든. 근데 네 아버지는 심장이 멈춘 후 정말 단 한 순간도 빠트림 없이 온전히 심폐소생술을 받은 거잖아. 그러니 그렇게 말도 안 될 정도로 긴 시간 동안 심장이 멎고도 보란 듯이 일어나신 거 아니겠어?”
“그러니 굳이 따지자면 네가 살린 거지. 아들인 네가. 심폐소생술로 말이야.”
전남대학교병원 응급의학과 조교수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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