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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3 (월)

장독 뚜껑으로 썼던 김환기의 도기 초상…60년만에 최초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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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장자 한기호씨 "내 것 아닌 것 같아 부담"
한국일보

[저작권 한국일보] 소장 중이던 김환기의 도자 작품을 처음 대중에 공개한 한기호씨는 이렇게 미술관에 전시되는 기회를 갖게 돼 작품이 운이 좋은 것 같다며 웃었다. 이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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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3월부터 서울 부암동 환기미술관에서 열린 ‘성심(聖心)' 전시에서 한국 미술의 거장 김환기(1913~1974)가 도기에 그린 여인 초상이 처음 일반에 공개됐다. 그림은 지름 30㎝ 크기의 둥근 도기 접시 위에 굵은 선으로 무심한 듯 그려진 한 여인의 초상이다.

접시 뒷면에 도기를 구운 '1961년'이 적혀 있는 걸로 봐서는 1960년대 초 홍익대 교수로 있을 때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백승이 학예사는 “단발머리나 부리부리한 눈매 등으로 봤을 때 아내 김향안(1916~2004) 여사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60년만에 세상에 나온 김환기의 작품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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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호씨 소장품 도자에 그린 여인 초상(왼쪽)과 비슷한 시기 김환기가 종이에 그린 '향안의 얼굴'. 환기재단·환기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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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만난 작품소장자 한기호(83)씨는 작품 공개 이유에 대해 "거장의 작품이니 지금이라도 모두가 공유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웃었다.

때는 196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씨는 서울대 문리대 동문이었던 친구(원소장자) 집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벽에 걸린 그림 한 점을 보게 됐다.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그림이 참 좋아보였다. “그랬더니 친구가 대뜸 ‘김환기라는 화가가 그린 건데, 저건 형이 받은 거니까 내가 받은 걸 줄게’라며 접시 하나를 건네더라고요. 그때는 그저 친구가 주니까 받은 거지요.”

1959년 프랑스 파리에서 돌아온 김환기는 1963년 다시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한국에 머물며 다양한 형태와 재료를 탐색했다. 백 학예사는 “그 과정에서 김환기는 소반 같은 일상적 사물에다 그림을 자주 그렸고 또 그걸 주변에 선물하곤 했다"고 설명했다.

한씨 손에 들어간 작품도 그런 작품 중 하나였다. 한씨에게 도자를 준 친구의 누나가 김환기의 부인 김향안 여사의 아주 친했던 이화여전 동기였다. 김 여사는 친구네 4남매에게 한 점씩 나눠가지라며 남편 김환기 작품 넉 점을 선물한 것.

친구가 준 것이니 고맙게 받긴 했는데 한씨로선 이걸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다. “접시라 벽에 걸 수 없으니 장식장에 넣어뒀지요. 어느 날은 보니까 어머니가 그걸 장독 뚜껑으로 쓰셨더라고요. 접시니까 이사 갈 때는 식기와 함께 싸매두시기도 하고요. 물론 문득 한번 생각나면 장식장에 꺼내놓고는 곁에 뒀지요. 접시가 친구 같지 뭡니까.”

그런데 슬슬 부담이 됐다. 김환기 이름값이 치솟아서다. 지난해 11월 홍콩경매에서 김환기의 ‘우주(Universe 5-Ⅳ-71 #200)’는 낙찰가 132억원을 기록했다. 한국 미술사상 최고액이다. “그런 소식들이 들리니까 부담됐죠. 농담이긴 하지만 주변에서도 '그럼 저 접시는 얼마냐'고 물어보기도 하고요." 이게 내 것이 아니라 싶어서 친구에게 도로 가져가라고도 했다. 하지만 친구는 "이미 오래 전에 준건데, 더구나 친구 사이 추억인데 무르는 게 어딨냐"며 더 단호하게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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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한국일보] 서울 부암동 환기미술관에서 연말까지 열리는 '성심' 전시. 김환기가 1950년대부터 1974년 작고하기 전까지 그렸던 '하트' 도상 등 55점을 전시해뒀다. 한기호씨가 소장품인 도기가 전시된 윗 편에 김환기의 작품 '성심'이 걸려 있다. 이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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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지난해 말 환기미술관을 찾았다. 작품은 대여 형식으로 연말까지 환기미술관에 전시된다. 자신에게 접시를 선물한 친구는 암 투병 중이다. 60년만의 작품 공개는, 그 친구에게 보내는 응원이기도 하다.

박미정 환기미술관 관장은 “작품 이면에 있는 친구 사이의 우정 등 아름다운 이야기에 감명받았다”며 “작품의 예술적 가치, 재화적 가치를 떠나 예술로 연결된 인간의 이야기를 통해 예술이, 전시가 한층 더 풍부해졌다"고 말했다.

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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