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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8 (화)

[연극 리뷰] `화전가`, 팍팍하고 슬픈 삶 지탱해주는`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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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아름다우면서도 서글프다. 웃음이 나오다가도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진다. 쉬는 시간 없는 140분 동안 감정이 수차례 요동쳐 끝나고 나면 진이 다 빠져 있다. 그래도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운 건 깊게 감춰두었던 마음속 응어리가 풀어진 덕분이리라. 국립극단이 창단 70주년을 맞아 걸작 '화전가'를 내놓았다.

작품의 배경은 6·25 전쟁을 한 달여 앞둔 1950년 4월 경북 안동의 반촌. 큰 어른 '김씨'의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가족들이 한 집에 모인다. 세 딸과 두 며느리, 행랑어멈 독골할매와 그의 양녀 홍다리댁, 그리고 같이 늙어가는 고모 권씨까지, 모두 여성들이다. 남자들은 죽었든지, 북에 있든지, 수감돼 있든지 등 저마다의 사정으로 오지 못했다. 오랜만에 만난 이들은 그간 못다한 얘기들을 맘껏 풀어낸다. 하 수상한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들의 일상은 역사의 일부로 승화된다. 여인들의 곪은 상처 속에 현대사의 굴곡이 넌지시 드러난다. 하지만 마냥 비통하지만은 않다. 지금의 삶이 팍팍하기에 오히려 조그만 데서도 희망을 찾으려 하는 덕분이다. 사람들이 함께 커피와 초콜릿, 설탕 등을 나누며 인생의 큰 행복인 양 즐거워하는 장면에선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몽글몽글한 안동 사투리도 목가적 분위기를 더한다.

김씨(예수정), 권씨(전국향), 큰딸 금실이(문예주), 둘째딸 박실이(이유진), 막내딸 봉아(이다혜), 큰 며느리 장림댁(이도유재), 둘째 며느리 영주댁(박윤정), 독골할매(김정은), 홍다리댁(박소연) 등 9명 배우들 연기가 어느 하나 모자란 데가 없다. 각 인물들이 갖고 있는 저마다의 삶이 작품 속에서 두루 조명된다. 그중에서도 예수정과 이다혜의 호연이 돋보인다. 예수정의 표정은 기쁨과 슬픔, 그리움과 회한 등 인생의 복잡다단한 감정들을 모두 담고 있다. 40여 년 연기 인생이 만들어낸 연륜이다. 이다혜는 귀여움과 발랄함으로 무대에 생기를 한껏 불어넣는다. "자지 마라. 자만(자면) 안 된다"며 전쟁통에 떠나간 이들을 그리는 마지막 장면은 그의 화사한 미소가 비극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그라데이션이 일품인 무대 배경도 볼거리다. '누르스름' '거무튀튀' '희끄무레' 등 세밀하고 다채로운 한국의 색들을 훌륭하게 구현해냈다.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이고 인물의 감정을 암시하는 데도 거든다. 일상복에서 외출복까지 여러 고운 의상들에도 눈길이 간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영화 '해어화' 등에서 활약한 한복디자이너 김영진의 솜씨다.

대한민국 연극대상에서 대상을 받은 이성열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직접 연출했다. 연극 '1945' '3월의 눈' 작가 배삼식이 3년 만에 쓴 신작이기도 하다. 오는 23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한다.

[서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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