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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매경이 만난 사람] 유홍준 前문화재청장·용산공원조성추진기획단 민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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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지난 5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만난 유홍준 용산공원조성추진기획단 민간공동위원장이 부채를 활짝 펴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한주형 기자]


"내 답사 인생에서 가장 감동적인 여행이었다." 17번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이하 답사기)를 펴내면서 유홍준(71)이 남긴 소회다. 6월 출간한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 편으로 '실크로드 3부작'을 마무리 지었지만 청산유수 입담을 자랑하는 그를 북콘서트나 강연 등에서 독자들이 만날 기회는 없었다. 코로나19로 인한 '격리사회'가 만든 변화다. 하지만 감염 속도가 잦아들면서, 27년 전부터 그가 펴낸 '답사기'가 다시 팔리기 시작했다. 10여 년 만에 국내 여행 전성기가 돌아오면서다. 5일 코엑스 별마당도서관에서 답사기 출간 이후에도 '방콕 생활'을 하고 있다는 그를 만났다.

―여행이 금지됐다. 어떻게 지냈나.

▷답사기를 1~2년에 한 권의 속도로 써 왔다. 작년 말까지는 스승인 김윤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의 장례위원장을 맡아 저작집을 묶어 내느라 바빴다. 그러다 답사기가 늦어져 내년은 돼야 책을 내겠구나 싶었는데, 1월에 코로나19가 터져서 밖에 못 나가니 3개월 만에 썼다. 다산 선생이 유배당하고 책을 많이 쓰신 이유를 알았다. 사람을 안 만나고 집중해야 창조하는 에너지가 생긴다는 걸 절감했다.

―국내 여행 바람이 근 10년 만에 분다. 답사기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출판사에서 실크로드 편이 나오니 국내 편이 더 잘나간다고 하더라. 그래서 얼른 서울 편을 다시 써 달라고 성화다. 내가 답사기로 너무 장기집권하고 있는데, 그래도 답사기의 의미를 찾자면 다른 분야에서도 답사기를 탄생시켰다는 거다. 이를테면 박상진의 '궁궐의 우리 나무'는 문화유산의 나무, 청와대의 나무, 부여의 나무 이야기를 썼다. 영남대 유홍준이 답사기를 쓴 걸 보고 감동을 받아, 책을 쓰게 됐다고 하더라. 이렇게 민속학, 국문학, 지리학에서도 다 그 분야 답사기를 쓸 수 있을 거다. 사람들이 아직도 전문적인 것과 대중적인 걸 분리하려 해서 문제다. 대중적이라는 말은 수준을 낮추는 게 아니라, 전문적 지식을 대중도 알아듣게 쓴다는 거다. 수준을 낮추면 안 된다. 답사기도 잘 읽히지만 어려운 책이다. 코로나19로 국내 편을 찾는 사람이 많아지니 서울 편, 섬 이야기도 쓰고 전국 곳곳 비장의 답사기를 체력 있을 때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줬다.

―왜 중국 편의 첫 여행지가 실크로드였나.

▷베이징, 장안(산시성 시안시의 옛 이름)부터 시작했으면 중화문화에 압도될 위험이 있었다. 한반도 역사를 동아시아사 속에서 보기 위해서다. 한나라가 한사군의 하나로 요동에 낙랑군을 둘 시기, 반대편에는 실크로드 화서주랑이 있었다. 모두 중국의 변방에 대한 완충지대 정책이었다. 이건 중국과 우리 역사를 다시 볼 계기가 된다. 다른 분야에도 한·중·일을 아우르는 작업이 있지 않나. 문화사를 내가 담당하리라 생각 못했지만 내가 이해하는 게 결국 이 시대 문화의 가늠자가 될 수도 있다. 다룬 사람이 없으니 무섭다. 일본의 이시이 고세이가 '동아시아 불교사'라는 걸 썼다. 그 책을 읽으며 우리가 너무나 폐쇄적·방어적 민족주의에 갇혀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우리는 넓은 세계의 시각에서 한반도를 본 경험이 부족하다. 답사기를 굳이 일본 편 4권, 중국 편 10권을 쓰는 건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한국을 이야기하는 게 중요한 의미가 있어서다. 중국, 일본은 동아시아를 아우르는 동양미술사 저술이 있다. 답사기는 내 의무지만 나를 넘는 후배가 나와야 한다.

―다음 답사기는 어디로 향하나.

▷당장은 '한국미술사강의' 4권을 졸업해야 한다. 4권은 조선의 회화를 제외한 미술사인데 궁중미술, 양반미술, 서민미술을 아우르는 쉽지 않은 작업이다. 답사기와 미술사를 오가면 나도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아 도움이 된다. 중국은 4부작으로 쓸 거다. 장안과 낙양(뤄양)을 중심으로 한 5대 고도, 다음엔 강남 선비문화와 정원, 마지막으로 상하이 임시정부부터 연행사신의 길을 따르는 이야기를 쓸 거다. 10권이 넘을지도 모르겠다. 실크로드는 워낙 가기 힘든 곳이라 여행을 한 번 다녀와 기행기처럼 쓰게 됐지만, 다른 지역은 셀 수 없이 다녀왔다. 여행이 막혔다고 지장이 있진 않을 거다. 머릿속에 있는 걸 쓰기만 하면 된다.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한국 문화가 탄생하고 있다.

▷그동안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은 자기 방어적이고 세계에서 낙오된 콤플렉스의 표현이었다. 한국은 서구 문명과 신사조에서 언제나 낙오되지 않았다. 동시에 나를 지키는 민족주의도 있었다. 이 덕분에 문화적 경험을 우리보다 폭넓게 한 이들이 많지 않다. 미국이나 유럽과 달리 서양도 알고 우리도 알고, 좋은 걸 비빔밥처럼 섞으니까 그런 성공을 거둔 거다. 게다가 BTS 같은 음악은 '서태지와 아이들' 때도 있었다. 그때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없었다. 지금은 SNS를 타고 세계로 넘어가게 된 거다. 이제는 한류의 중간 점검을 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정부 개입 없이 판만 깔아주면 방시혁도 봉준호도 이수만도 나오는 거다. 이어령, 김용옥, 나 같은 옛날 사람도 그동안 느낀 걸 툭 터놓고 대화를 해보면 좋겠다.

116년 만에 되찾은 용산…아파트 짓자는 건 어불성설
아픈 역사의 흔적 간직한 땅, 치유의 공간으로 탄생시켜야…세계적 관심 속 공원으로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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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년 만에 용산의 문이 열렸다. 1904년 일제가 위수지역(衛戍地域)으로 선포한 이래 처음으로 8월 1일 미군 장교 숙소 5단지 용지가 민간에 개방됐다. 유홍준은 용산공원조성추진기획단 민간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다. 문화재청장을 지낸 그는 용산 공원에 어떤 밑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어떤 모습으로 돌아오나.

▷미군 용산기지 반환에 대한 협정은 2005년 노무현정부 때 시작했다. 2011년 용산 공원 마스터플랜 국제 설계 공모를 했고, 6년에 걸친 설계 끝에 네덜란드 조경 회사 West8과 승효상 대표의 이로재 등이 함께한 '치유: 미래의 공원' 안이 2018년 확정됐다. 1년 동안 국민 의견을 받을 계획이고, 내년에 계획 확정 뒤 본격적으로 실시설계에 들어간다. 현재 미군 90%가 평택으로 철수했다. 10%가 마지막으로 떠나는 최종 목표가 2025년이다. 자연생태공원으로 만들 계획이다. 많은 사람의 기대는 뉴욕 센트럴파크 같은 공원이 서울에 생겼으면 하는 거다. 894동의 기존 건축물 중 81동은 재활용하고, 나머지는 해체해 80% 이상을 녹지화할 계획이다. 새 건물은 짓지 않는다. 이번에 개방된 5단지 장교 숙소 18개동 중에도 5개동은 전시관, 홍보관, 카페로 쓰고 나머지 13개동은 어떻게 쓸까 고민 중이다. 여행자들이 묶을 수 있는 유스호스텔로 쓰는 게 좋을 것 같다. 공원의 최종 완성은 2030년으로 보고 있다.

―용산 공원의 역사적인 의미는.

▷용산 반환은 감격적이고 눈물 나는 일이다. 우리 땅인데 식민지에 내준 걸 다시 찾은 거다. 러일전쟁이 끝난 뒤, 일본군이 주둔하기 위해 서울 근교 300만평을 위수지역으로 묶었다. 보광동, 서빙고 일대가 토지거래허가제로 거래가 금지됐고, 일본군이 들어왔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연합군이 인수했고, 6·25전쟁 이후에는 휴전 후 미국 8군 사령부가 들어왔다. 역사적으로 아픈 땅이지만, 전화위복이 된 거다.

―공원에 문화재적 가치가 있을까.

▷116년 동안 군대가 주둔해 실제로는 군대 유산만 남았다. 일본군 사령부, 위수감옥, 미군이 쓴 건물, 막사 중에도 기록으로 의미 있는 건 남겨야 한다. 안을 둘러보고 감동받은 건 미 8군 사령관실이었다. 테이블 하나만 달랑 있는 집무실이 얼마나 작은지…. 100년 전 미국의 실용주의에 놀랐다.

―용산 공원에서 지켜야 할 가치는.

▷2030년 완공을 못하더라도 백년대계로 완성해 물려줘야 한다. 요즘 서울에 아파트 지을 땅이 없어 용산을 10만평만 떼어주라고 하던데, 그런 압력에 절대로 굴하면 안 된다. 미군기지가 아니었으면 이미 다 구제할 수 없는 아파트촌과 슬럼가가 됐을지 모르는 땅이다. 서울에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진 이 100만평 땅을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다행히 한국이 눈부신 발전을 했고, 국제 공모에 당선될 건축가도 배출하는 나라가 됐다. 정말 잘 복원해야 한다. 역사 속 용산은 용산역 만리동 원효로 일대였다. 미군기지는 둔지산으로 불렸고, 만초천이 흘렀다. 무악재에서 원효로로 흐르는 천이다. 남산에서 자연 상태로 보존된 물줄기를 되살리는 것도 하이라이트다. 공원 이름은 국민 공모를 할 생각이다. 역사적 의미를 품은 이름이 만들어졌으면 싶다.

▶▶ He is…

△1949년 서울 종로구 출생 △1967년 중동고 졸업 △1980년 서울대 미학과 졸업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 등단 △1991년 영남대 조형대학 교수 △2002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2004년 9월~2008년 2월 제3대 문화재청 청장 △2017년 용산공원조성추진기획단 민간공동위원장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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