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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일)

"한국 생활 60년 비결? '눈치' '분수 알기' 그리고 '함께'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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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메리놀회 함제도 신부 회고록 '선교사의 여행' 펴내

청주교구 30년, 북한 돕기 30년 과정 생생

조선일보

함제도 신부가 1960년 사제서품 때 받은 십자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함 신부는 "이 십자가는 제가 무덤에 갈 때 관에 넣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태경 기자


미국 천주교 메리놀회(會) 함제도(미국명 제라르드 하몬드·87) 신부가 사제 서품과 한국 생활 60년을 맞아 회고록 ‘선교사의 여행’을 펴냈다. 작년 여름부터 9차례에 걸쳐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소장 강주석 신부) 연구팀과 인터뷰를 통해 구술(口述)한 내용을 엮었다.
1933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아일랜드계 이민자 후손으로 태어난 함 신부는 1960년 사제품을 받자마자 한국으로 왔다. 그는 파견 당시 ‘1·2·3지망’을 모두 ‘한국’으로 적어냈다고 한다. 회고록 ‘선교사의 여행’에는 지금은 대다수 한국인들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어렵던 시절의 한국 풍경이 생생하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못 사는 나라와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다. 같은 눈높이에서 느끼는 연민(Compassion)이다. 29년 동안 청주교구에서 지내다 1989년 메리놀회 한국 지부장을 맡아 1995년 이후 작년 3월까지 60여차례 북한을 방문하면서 지원에 나선 태도 역시 다르지 않다. 함 신부는 “고통을 겪은 같은 민족이 마음을 열어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함 신부는 회고록 인터뷰에서 “신부님은 진보냐 보수냐”는 질문에 “나는 가톨릭”이라고 답했다. 그는 고생스러웠던 과거를 이야기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았다. “기쁘게 살기 위해 신부가 되고 싶었다”는 함 신부의 말처럼 회고록은 기쁘게 살아온 이야기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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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제도 신부의 회고록 '선교사의 여행'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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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5일 선종(善終)한 장익 주교님과 절친한 사이로 알려졌습니다.
“1951년 펜실베이니아의 메리놀 소신학교(고교과정)에서 만났습니다. 제 옆자리에 앉게 돼 ‘짝꿍’으로 친해졌죠. 장 주교님은 제게 ‘친구’가 아니라 진짜 ‘형제’같은 분이었습니다. 생일은 제가 석달 빠르지요. 저에겐 항상 ‘사제가 되면 한국으로 오라’고 했지요.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상의해줬고요.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만났을 때 장 주교님에게 ‘형님’이라 불러보라고 시키고 저는 ‘오냐~’하고 농담하고 옛날 이야기하면서 웃고 서로 강복(降福)하고 헤어졌습니다. 장례 미사 때 많이 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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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놀 소신학교 당시 장익 주교(오른쪽 네번째)와 함제도 신부(오른쪽 다섯번째).함 신부는 "이런 말 해도 될까?"라며 "장 주교와 저는 불알친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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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 선택은 평생을 좌우하는 일인데 장 주교님과의 인연만으로 한국행을 택하셨나요.
“장 주교님과 만난 후 메리놀대에 진학했을 때 북한에서 선교하다 추방된 선배 선교사들로부터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한국을 선교지로 결심했지요. 메리놀회는 1920년대 평양교구에서 선교하다 미국과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시작되면서 일제에 의해 전부 추방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국에 왔을 때에도 ‘오라우, 가라우’하는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선배들이 많았습니다. 저희들은 원래 북한에서 활동한 분들을 ‘북한 신부’, 남한으로 바로 온 분들은 ‘남한 신부’라고 부르지요. 한국으로 간다고 말씀드렸더니 할머니 할아버지는 우시고, 신부 되는 것을 반대하던 아버지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어요.”

-아버지 반대를 무릅쓰고 대신학교에 진학한 이유가 ‘기쁘게 살고 싶어서’라고 하셨는데, 사제로서 기쁘게 사셨습니까?
“정말 기쁘게 살았습니다. 저는 아일랜드계 이민자 후손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아일랜드계는 미국에서도 가난하게 살았어요. 그래서 가난이 익숙했습니다. 또 아일랜드는 400년동안 남북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갈라진 것도 이해하지요. 그렇지만 처음 샌프란시스코에서 화물선 타고 떠날 땐 ‘실수한 것 아닌가’ 두려움도 많았어요. 게다가 선배 선교사들 사진을 보면 한국 사람들은 하나도 웃는 사람이 없었어요. 막상 만나보니 아니었습니다.”

-장호원성당에서 아이들과 놀고 난 후 선교사로서 ‘로맨스’를 시작하셨다고요?
“처음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느날 지부장 신부님이 저를 운전시켜서 장호원성당에 갔어요. 신부님은 일 보시고 저는 마당에서 아이들과 놀았어요. 서양 사람을 보고 호기심에 다가온 아이들에게 ‘눈을 먹을까? 코를 먹을까? 입도 먹을까? 왁!’하고 놀래키면서 재밌게 놀았죠. 돌아오는 길에 그 이야기를 했더니 ‘신부님은 비로소 로맨스를 시작한 겁니다’라고 하시더군요. 그해 성탄절은 보은성당에서 보냈는데 성가(聖歌) 노래 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 민족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지요.”

함 신부는 1960년부터 1989년까지 청주교구 북문로성당, 수동성당, 괴산성당의 주임신부와 청주교구 총대리를 지냈다. 가난했던 당시, 함 신부가 자전거 한 대를 사려고 해도 주교는 거부했다. “왜 한국 사람들보다 편하게 살려 하느냐”는 이유였다. 그리고 신부들에게 “미사 때 돈 이야기 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당시 선교사들은 미국 메리놀 본부에서 보내주는 달러를 서울 명동 암달러상에게 바꾸면서 차액으로 장학사업들을 벌였다.

-청주교구에서 보낸 30년이 매우 행복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럼요. 기뻤습니다. 저희는 한국어가 잘 안 되니 미사 강론보다는 직접 많이 찾아다녔어요. 5일장이나 장례식장 등 사람 모이는 곳을 찾아다녔어요. 신자들 가정도 다 방문하고요. 신자들은 가난한 가운데도 정성껏 맞아주셨습니다. 괴산성당 주임 시절 한번은 ‘뭘 좋아하시냐’고 물으시기에 ‘삼계탕’이라고 했더니 14개 공소(公所)에 갈 때마다 삼계탕을 먹기도 했습니다. 수동성당을 지을 때엔 제 할아버지, 할머니의 유산을 미리 받아서 땅 사서 지었어요. 어머니 회갑잔치도 청주에서 열었죠. 제가 원래 성격이 급한 편인데 한국 와서 더 급해졌어요. 그나마 다행인 것이 청주교구에서 29년 보낸 거죠. 다들 ‘천천히 하는겨~’라고 하시니까요. 지금 제 무덤 자리는 청주교구에 있어요. 두 자리를 부탁했어요. 제가 뚱뚱해서 2인분이 필요해서요, 하하.”

-외국인 선교사로 한국 생활 60년의 비결을 꼽는다면 무엇입니까.
“‘눈치’와 ‘분수(알기)’ 그리고 ‘함께’입니다. 서양 사람들이 눈치가 없는 편이에요. 자신의 분수를 알고 눈치껏 살기가 쉽지 않았지요. 저희가 처음 본당(성당) 주임신부하던 시절, 신자들이 주임신부를 놔두고 이야기하지 않아서 섭섭해 했더니 선배님들이 ‘시기하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저희 선교사는 한국에 올 때 ‘미국 게토’ 즉 미국 교회처럼 만들려고 온 게 아니라, 최대한 한국사람처럼 만들어서, 한국인의 입장에서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메리놀회는 선교지에 가면 이름부터 현지식으로 바꿔요. 부르기 쉽게. 솔직히 100% 한국사람을 닮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늘 하지요. 그러면 마음이 좀 편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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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으로부터 훈장을 받는 함제도 신부. 함 신부는 "저는 이 세상에서 미리 상을 받았으니까 하늘에서 받을 상이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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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 신부의 한국 생활 60년은 청주교구 30년과 북한 돕기 30년으로 나뉜다. 1989년 메리놀회 한국 지부장에 임명된 그는 당초 ‘3년’을 마음 먹었다가 계속 연임했다. 그는 1995년부터 개신교계 유진벨재단과 협력해 북한의 결핵환자 지원 사업을 돕고 있다. ‘왜 개신교를 돕냐’ ‘왜 공산주의자를 돕냐’는 비난도 많이 받았다.

북한 지원 문제와 별도로 선교회 내부적인 고민도 크다. 그가 지부장을 맡기 전부터 지금까지 35년 동안 미국인 선교사 자원자가 없다. 1953년 6·25전쟁 끝무렵에 서울 중곡동에 자리잡은 메리놀회는 현재 남은 선교사 8명 중 4명이 80대 고령에 접어들자 부지와 건물을 서울대교구에 넘기고 지난 3월 서울 신길동 대방동성당 옆 ‘정규하 관(館)’으로 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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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벨 재단과 함께 북한을 60여 차례 방문한 함제도 신부. 18개월에 걸친 치료를 마친 환자들에게 종이학을 접어 만든 목걸이를 선물하고 있다./유진벨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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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에서 ‘관심’을 당부했습니다.
“제일 무서운 것이 무관심입니다. 1960년 처음 한국에서 받은 인상은 ‘가난하지만 자존심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 북한이 그렇습니다. 1960년 당시 선배 선교사들은 ‘우리가 여유있어서 나눠준다고 하면 안 된다. 항상 상대를 존엄과 존중으로 대하라’고 했습니다. 받는 이들이 부끄럽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북한 사람들도 똑 같은 민족입니다. 자존심 굉장히 강합니다. 또 70년 동안 갈라져 살아온 시간의 간격이 큽니다. 새터민 문제를 봐도 그렇습니다. 취업부터 여러 면에서 어려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통일 되면 이 분들은 북쪽으로 돌아갈 사람들입니다. 고향에 가서 뭐라 하겠습니까. 가족처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요즘은 어떤 기도를 하시나요.
“새벽에 눈 뜨면 세 가지를 기도합니다. 평화, 민족화해, 대화입니다. 핵(核)문제는 솔직히 너무 어렵습니다. 이런 기도부터 합니다. 초대 교회처럼 신자들이 서로 사랑하고 신경 많이 써주면서 살아가면 좋겠지요. 한국 교회는 특별합니다. 순교자 정신과 평신도 중심의 전통이 있습니다. 이는 천주교회사에서도 특별합니다. 저는 한국 교회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5000년 역사에서 남을 침략하지 않았습니다. 이젠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적어도 아시아에서는 복음, 기쁜 소식을 전할 능력과 경제력도 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책에선 ‘(사제들이)미사에서 만나길 기다리지 말고 더 많이 만나도록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서로 인내하고 이해하면서 적극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성당에서 기다리지 말고 자꾸 만나야 합니다. 저는 한국에 와서 고해성사를 보면서(들으면서) ‘나보다 더 신앙이 깊구나’ 하는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저는 편히 사는데, 그런 어려운 상황에 살면서 정신적으로 힘든데, 신앙이 너무 깊은 분들이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느끼는 것은 하도 똑똑해서 하나하나는 너무나 똑똑하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함께’가 중요합니다. 한국은 5000만 밖에 안 되잖아요? 목적을 알고 뭉쳐서 밀고 나가면 됩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함 신부는 “다음엔 치맥 한 턱 내겠다”고 했다. “왜 한 턱 내는지 아세요? 제가 두 턱이잖아요. 하하.”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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