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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4 (화)

"예술인들과 사진 인생 40년… 後代에 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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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법정 등 촬영해온 이은주, 300여명 자료 예술기록원에 기증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백건우·윤정희' '서양화가 박서보' '명창 안숙선' '이애주 교수 춤본' '화가 김병종, 소설가 정미경 부부'…. 사진가 이은주(75)의 분당 작업실 책꽂이엔 한국 대표 예술인들의 이름이 적힌 A4 크기 파일이 빼곡했다. 주인공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필름, 촬영 메모 따위를 갈무리한 파일들이다.

1981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사진 부문 대상을 수상한 이은주는 무용을 시작으로 음악·미술·연극·종교 등을 넘나들며 문화예술인들을 카메라에 담아왔다. 40여년 촬영해온 그 사진들의 필름과 디지털 파일을 포함한 자료 일체를 아르코예술기록원(구 국립예술자료원)에 기증하기로 했다. 자료는 13일부터 기록원에 순차적으로 전달된다. 파일 더미 앞에 선 이은주는 "내 사진 인생을 몽땅 다 주는 것"이라고 했다. "카메라 앞에 서 주셨던 분들께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죠. 그분들의 작품도, 제 작품도 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후대에 남겨야 할 기록이자 유산이라는 생각에 기증을 결심했습니다. 아쉽지 않아요."

조선일보

경기도 분당 작업실에서 이은주가 오랜만에 낡은 카메라를 다시 잡았다. 책꽂이에 가득한 필름 등 자료들은 아르코예술기록원에 기증해 향후 공개될 예정이다. /김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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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담긴 인물의 수로 따지면 300여명. 작품을 기증하려면 이들로부터 초상권 동의를 받아야 한다. 이은주는 "일일이 연락드리느라 손가락에 쥐가 날 지경"이라고 했다. 그래도 거의 모두가 흔쾌히 허락해줬다고 했다.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이은주의 요청에 '백건우·윤정희 초상권을 허락합니다'라고 써서 서명한 종이를 들고 음식점에 앉아 있는 자신의 사진을 휴대전화로 보내왔다.

기증을 위한 정리 작업이 쉽지 않았다. 수만 건의 필름과 파일을 살펴서 잘못 찍힌 사진 등을 골라내는 일도 만만찮지만, 추억에 잠겨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아서였다. 이은주는 "삶과 죽음을 모두 지켜본 두 사람"으로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과 법정 스님을 꼽았다. "음악 전공한 백 선생님에게 '피아노 좀 쳐보세요' 했더니 당신이 유행가는 잘 친다며 '봉선화'며 '신라의 달밤'을 치는 거예요. 왼손을 못 쓰시니까 오른손만으로…. 장례식에선 조문객들이 각자 넥타이를 잘라 시신 위에 올렸는데, 얼굴을 어찌나 곱게 분장했는지 돌아가셨다는 게 믿기지 않았죠. 법정 스님은 시신에 천을 덮었는데도 생전 얼굴이 그대로 보이는 것 같았고…. 두 분 장례식 사진은 발표 안 했는데 앞으로 기록원에서 공개되겠죠."

한 컷의 필름, 한 장의 사진이 모두 인연이고 그리움이다. 김병종 교수의 급한 부탁을 받고 인화해 보낸 김 교수의 아내 정미경(1960~2017) 소설가 사진은 영정이 되고 말았다. 카메라 마니아 박서보 화백 파일엔 이런 메모가 있다. "박서보 화백은 사진작가보다 더 잘 찍는 분이다. 그러나 내가 연출하면 잘 듣는 모델."

이은주는 사진이 귀했던 대학 시절 '교내 사진사 아저씨가 사진 찍는 모습이 멋져 보여서' 사진을 시작했다. 이제는 그만 찍으려고 해도 종종 요청이 들어온다고 한다. "오래 같이 해왔으니 찍어달라는 분들이 있어요. 얼마 전에도 부탁을 받고 카메라 들고 나갔는데, 자신 없다가도 무대 앞에 서면 또 찍게 돼요. 나중에 보니까 잘 나왔더라고요, 호호."





[채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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