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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한국전쟁 전야, 안동에 번지던 여인들의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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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국립극단 70주년 기념작 ‘화전가’의 한 장면. 닥쳐오는 비극을 알지 못한 채 화전놀이에 가져갈 술과 음식을 챙기는 여인들의 소소한 일상 풍경이 정겹고도 애잔하다. 국립극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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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들이 꽃으로 알록달록하다. 수양버들은 멋스럽게 늘어졌고, 개울에선 물고기가 참방참방 뛰어오른다. 1950년 4월 한국전쟁 전야. 하지만 아직은 아무도 전쟁을 모를, 그 수상한 시절에도 봄은 한창이다.

경북 안동 ‘닭실할매’ 김씨네 집이 오랜만에 북적거린다. 김씨 환갑잔치 치르러 고향을 찾은 가족들이 한데 모였다. 그런데 무슨 낌새라도 있었을까. 문득 김씨가 환갑잔치 대신 화전놀이를 하잔다. “요맘때 봄, 차려 입고 나가가, 꽃도 보고 노래도 하는 기다. 일 년에 딱 하루, 화전놀이.”

국립극단 70주년 기념 신작 ‘화전가’는 한국전쟁 직전 대가족 여인네 9명이 함께 보내는 어느 하룻밤 이야기다. 이성열 예술감독이 연출을, 배삼식 작가가 극을 맡았다. 2월 공연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때문에 이제야 무대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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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의 미가 있는 담백한 무대는 한국화를 연상케 한다. 국립극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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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전놀이에 들뜬 여인들은 쉽게 잠들지 못한다. 음식과 술을 나누고, 예쁜 옷을 서로 입겠다며 투닥거리고, 둘째 딸이 가져온 미제 커피의 쓴맛에 놀라고, 그렇게 정겹다. 하지만 그 수다에선 예사롭지 않은 시대가 삐져나온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해방, 좌우 대립. 그러고 보니 여자들끼리 모여 이리 수다를 떨어대는 건, 역사의 거친 파도 속에서 집안 남자들이 죽거나, 감옥에 가거나, 그것도 아니면 저 머나먼 38선 너머에 있어서다.

현대사의 비극을 겪어낸 여인들 이야기를 통해 ‘화전가’는 상처를 어루만진다. 역사의 숨겨진 동력으로서 여성 연대를 조명한, 새로운 여성 서사로도 읽힌다. 여배우 9명의 빼어난 연기 호흡이 이를 탄탄하게 떠받친다. 이성열 감독은 “명랑하고 천진난만한 여인들 모습에서 남자의 빈자리는 느껴지지 않는다”며 “여성의 주체적 삶을 강조하려 했다”고 말했다.

대사는 모두 안동 사투리다. 억세지 않은, 보드라움이 극에 색다른 질감을 입힌다. “삼시(三尸)라꼬, 사램 몸에가 벌거지가 시 마리 산단다. 머리에 한나, 배에 한나, 아랫도리에 한나….” 옛 풍습에 사투리까지 더해졌으니 뜻은 얼른 와닿지 않아도, 명랑한 운율 덕에 귀가 즐겁다. 배삼식 작가가 처가 쪽 안동 사투리를 참고했고, 배우들도 안동 사람에게 별도로 배웠다. 여백을 종소리, 풀벌레 소리, 바람 소리로 가득 채운 담백한 무대도 그 자체가 탁월한 미장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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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버린 존재들에 대한 그리움이 담긴 무대가 아픈 역사를 되새기게 한다. 국립극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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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결 같은 하룻밤은 눈물로 끝난다. 그 행복이 오래가지 못하리라는 걸 관객들도 잘 알고 있다. 이제 다 겪어낸 것만 같은 이들 앞에, 또 다른 비극이 기다리고 있어서이기도 하다. 이성열 감독은 “지금은 사라져 버린 존재들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가 극에 녹아 있다”며 “과거의 아름답고 슬픈 기억을 함께 되새겼으면 한다”고 말했다.

“무정한 시간이 밤의 재 흩뿌리며, 그대의 한낮을 어둡게 물들일 때, 시간이 앗아간 그 모든 것을, 나 여기 다시 새기네, 그대를 위하여.” 영문학도인 막내딸이 낭독하던 셰익스피어 소네트 15번의 한 구절이 극의 시작과 끝에 나지막이 흐른다. ‘화전가’는 그렇게 시간이 앗아간 존재들을 우리 가슴에 다시 새긴다. 23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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