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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 (화)

"밀집된 본사 필요없다"…美 `REI’의 본사매각이 남다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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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미 대표 아웃도어 기업 REI 로고.


'마이크로소프트(MS), 아마존, 보잉, 스타벅스, 코스트코, 익스피디아, 노드스트롬'

미국 북서부에 위치한 워싱턴주 시애틀 지역에는 이처럼 내로라하는 기업 본사가 몰려 있습니다. 남부 실리콘밸리가 첨단 ICT 기업의 중심지라면 시애틀 지역은 IT·제조·식료품·유통업이 망라된 '융합'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애틀 주민들이 이곳 대표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만큼이나 사랑하는 토종기업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REI’라는 아웃도어 용품 기업입니다.

1938년 시애틀에서 설립돼 82년의 역사를 가진 이 업체는 미 전역에 140여개 매장을 가동하는 미국 대표 아웃도어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지난 2017년 애틀랜틱 미디어가 지역민들을 상대로 일종의 기업 인기투표(자랑스러운 지역기업)를 했는데 REI는 스타벅스를 제치고 MS·게이츠재단·아마존·코스트코에 이어 5위를 기록했습니다.

연매출 3조원대인 이 기업이 30조원을 버는 스타벅스보다 더 사랑받는 이유는 바로 탐욕에 대한 집착을 회피하는 '역발상'으로 혁신을 창출하기 때문입니다.

자유시장경제에서 탐욕은 기업의 성공과 혁신을 추동하는 첫 출발점입니다. 그런데 REI는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되는 특이한 구조입니다. 소비자가 20달러를 내고 연간회원으로 가입한 뒤 일정액 이상을 구매하면 REI는 그 해 번 이익의 일부를 쿠폰형태 등으로 환원해줍니다.

그런 REI가 미국 재계를 통틀어 가장 주목받은 혁신은 바로 2015년 블프(블랙프라이데이) 유급휴가 정책입니다.

모든 미국 기업이 11월 넷째 주 목요일(추수감사절) 뒤인 블프 연휴 때 전 매장을 풀가동하며 재고떨이에 나서는 것과 달리 REI는 매장을 열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막대한 이윤을 얻을 수 있는 기간임에도 REI는 1만2000여명의 직원들에게 유급휴가를 제공합니다. 경영 상 배임에 해당할 수도 있는 이런 파격 결정을 내린 이유는 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바로 직원복지와 사회공헌입니다.

연중 가장 저렴하게 소비를 할 수 있는 시기가 도래한 만큼 근로자들에게 "쉬면서 타사 제품을 마음껏 쇼핑하라"고 기회를 주는 것이죠. 회사의 정체성이 '아웃도어'인만큼 연휴 때 캠핑 등 외부활동을 즐기라는 취지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거듭 강조하자면 이는 블프 때 한 해 매출의 20% 안팎을 챙길 수 있는 다른 기업 입장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조치입니다. 그럼에도 REI는 이 특유의 블프 유급휴가 정책을 2015년 시작해 지난해까지 한 해도 빠짐없이 시행해왔습니다.

그런데 REI가 이 파격 정책과 더불어 창립 82년인 올해 또 하나의 새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룹의 새 도약을 목표로 시애틀 벨뷰 인근에 짓고 있는 새 본사를 직원이 입주하기도 전에 매각하는 결정을 12일(현지시간) 발표한 것입니다.

82년 동안 불문율처럼 유지해온 도심 대형 본사 전략을 포기한 이유는 하나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재택근무를 실시한 결과 업무 효율성이 상당히 좋았다는 것입니다.

매일경제

미국 대표 아웃도어 기업 REI가 올해 입주를 목표로 2018년부터 짓기 시작한 새 본사 조감도. 거액을 쏟아부은 이 캠퍼스를 매각하고 근로자들이 거주하는 곳 중심으로 위성 사무실을 운영해 근로자 편의성을 높이고 지역사회에 기여한다는 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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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전 REI 경영진의 머리 속에는 함께 모여 일하는 형태가 최고의 효율성과 시너지를 가져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3월 재택근무를 시작해 5개월 여간 성과를 보니 집단거점 중심의 도심 본사가 '최적'이라는 믿음이 절대가치가 아님을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에릭 아츠 REI 최고경영자(CEO)는 12일 임직원들에게 "올해의 극적인 사건들을 통해 과거에 가졌던 많은 사업의 가정을 재검토해왔다. 여기에는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일을 하느냐의 문제도 포함됐다"라며 새 본사 매각과 이에 따른 위성 사무실 운영 계획을 전했습니다.

REI가 대안으로 선택한 가치의 중심에는 '근로자 거주지 위주'라는 대원칙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직원들이 사는 주요 지역을 파악해 이 근처에 소규모 위성 사무실을 빌려 운영하겠다는 방향성입니다.

사실 구글, 페이스북 등 많은 IT기업이 팬데믹 장기화 국면에서 일찌감치 이 같은 원격·재택 근무정책을 확정했습니다.

그런데 REI는 이런 글로벌 첨단 IT 기업이 아니면서도 늘 역발상으로 자신만의 혁신을 추구한 기업이라는 점에서 결정의 무게감이 남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도시 중심에서 직원 근무지 중심으로 지역 위성 사무실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REI는 영세한 지역 상권을 살리는데 대기업이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우리의 집(본사)은 더이상 빌딩이 아님을 (올해 팬데믹이)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 우리의 새 집은 근무 열정을 살리고 지역사회를 돕는 방향으로 우리 스스로 찾아다니는 곳이 될 것이다."(에릭 아츠 CEO)

82년 간 일반 기업과 다른 역발상으로 혁신을 추구해온 REI가 12일 임직원들에게 설명한 새 본사 운용 전략의 요체는 이렇듯 '근로자 중심'과 '지역사회 기여'로 요약됩니다.

[이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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