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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길이 180cm, 말총 수백올…금강산 구룡폭포 거대 암벽글씨 ‘미륵불’ 희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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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석의 시사문화재]

일제강점기 서화가 김규진이 단 한번 휘두른 붓

넓은 장소 수백장 종이 붙여놓고

붓에 긴 끈 달아 가슴에 묶고

10명이 일주일 간 대야먹물 찍어

성큼성큼 걸어다니며 일필휘지


한겨레

한국 근현대 서예전이 열리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2층 전시장에 나온 해강 김규진의 대필(큰 붓). 길이 180㎝, 지름 6.1㎝로 어른의 키를 훌쩍 넘는다. 일제강점기까지 만들어진 전통 붓 가운데 가장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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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큰 붓으로 어떻게 글씨를 썼을까?

지금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2, 3층에 차려진 ‘미술관에 서(書)―한국 근현대 서예전’의 2부 전시실 들머리에 가면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는 궁금증이다. 사람 키를 훌쩍 뛰어넘는 거대한 붓이 유리 진열장에 꼿꼿이 수직으로 서서 관객을 맞는 까닭이다.

붓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조선의 미술판에서 막강한 실력자로 군림했던 서화가 해강 김규진(1868~1933)이 썼던 대필이다. 그의 아들인 서화가 청강 김영기가 1970년대 성균관대 박물관에 기증한 명품 전통 붓이다. 붓대는 통죽을 썼고, 그 끝에 붓털을 고정하는 깍지를 달고 말총(말의 꼬리털)의 속털로 만든 수백올의 털을 달아놓았다. 지름은 6.1㎝에 불과하지만, 길이가 180㎝나 되니 보통 사람이라면 붓대를 잡고 글씨를 쓰기는 고사하고, 계속 부지하고 있기도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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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강 김규진이 쓴 대필의 아래 붓털 부분. 말총(말의 꼬리털)의 속털 부분만 모아 만들었다. 붓털 위에 보이는 붓대와의 이음 부분(필경)에는 해강이 금강산에 미륵불 세 글자를 새길 때 쓴 붓이라고 설명한 한자 문구가 보인다. 1968년 해강의 제자인 전각가 안광석이 새긴 것이다.


흥미롭게도 해강의 대필은 오직 하나의 작품을 쓰기 위해 만들어졌다. 지금은 휴전선 이북에 있는 천하제일 명산 금강산 외금강 구룡폭포의 암벽에 1919년 국내 최대 규모로 새겨진 글씨인 ‘미륵불’(彌勒佛) 대각서의 원본을 쓰기 위한 용도였다. 100여년 전 당대 최고의 공방인 이왕가 제작소에서 해강에게 만들어준 특제품이다. 당시 금강산 신계사 임석두 스님과 현지 불자들의 부탁으로 큰 기와집 세채 값을 받고 써준 미륵불 새김글씨는 글씨와 그림에 모두 능했던 당대 최고의 서화가 해강의 대표작이자, 한국 근대 서예사에서 빠질 수 없는 명작으로 기억되고 있다. 상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미륵불’ 원본을 쓰기 위해 해강은 넓은 장소에 수백장의 종이를 붙여 운동장처럼 펼쳐놓고 붓에 긴 끈을 달아 가슴에 묶고 성큼성큼 걸어 다니면서 일필휘지로 ‘미륵불’ 글자를 거침없이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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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발행된 금강산 엽서. 컬러 도판으로 외금강 구룡폭포와 암벽에 새긴 미륵불 글자의 이미지를 실었다.


아들인 청강 김영기 등 유족의 증언을 보면, ‘미륵불’ 모본을 쓸 때 제자와 지인 10여명이 일주일 이상 먹을 갈아 큰 대야 여러개에 먹물을 채웠고, 여기에 붓을 찍어 글씨를 썼다고 한다. 해강은 붓대를 몸에 묶고 자유분방하게 글씨를 쓴 서예 퍼포먼스를 선구적으로 실행한 전위 서예의 원조인 셈이다. 실제로 이 모본을 바탕으로 쓴 금강산 구룡폭포 암벽의 ‘미륵불’ 새김글씨는 한 획의 폭과 깊이가 2~3m에 달해 사람이 쑥 들어갈 정도이고, 마지막 佛(불)자의 삐침 획은 길이가 구룡폭포 아래 연못의 깊이인 13m에 달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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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키를 훌쩍 넘는 대필(큰 붓)을 들고 앉은 해강 김규진의 생전 모습.


명필들의 글씨 명작은 많아도 명작을 쓴 붓이 전해지는 경우는 없지만, 해강의 대필은 워낙 용도가 특별하고 크기가 압도적이어서 글씨와 더불어 후대에 명성과 함께 존재를 온전하게 남긴 유일무이한 사례로 남게 됐다.

‘미륵불’의 모본 글씨를 해강이 쓰고 새긴 1919년은 3·1운동이 일어난 해다. 불교도들의 부탁에 따라 종교적 목적으로 글씨를 새겼지만, 미륵불이 새로운 광명세상을 뜻하는 것이기에 해강은 3·1운동을 의식하며 각별한 마음으로 글자를 썼을 것이라고 붓대를 조사한 성균관대 박물관의 김대식 연구실장은 추정했다. 하지만 ‘미륵불’을 비롯해 해강이 금강산 내외금강에 남겨놓은 여러 석각 글씨들은 춘원 이광수 등 여러 지식인으로부터 대자연을 파괴하는 행위라며 격렬한 비판을 사기도 했다. 해강의 뛰어난 필력과 예술성 덕분에 그의 작품이 지닌 자연 파괴의 일면은 후대에 나름 용인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해방 뒤 북한 정권 시기에 숱한 탐승객의 이름과 이념적 구호가 마구잡이로 새겨지면서 흉한 몰골을 드러낸 금강산의 후대 상황을 생각하면 해강의 글씨를 마냥 예술혼의 결실이라고 상찬하기에는 개운치 않은 구석이 남는다. ‘미륵불’ 글자를 외금강 암벽에 새긴 일본 장인 스즈키 긴지로는 30년대 서울 인왕산 암벽에 조선총독부의 선전 구호를 새긴 인물이기도 하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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