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4 (화)

"조서를 버려라" 특수통 여환섭의 '대구실험'… 檢 자생적 변화에 쏠리는 눈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대구지검 '조서 없는 수사', 검찰 내에서 회자
6월 597건 처리하는 동안 조서 작성은 1건뿐
'공판준비형 검사실' 운영도 유의미한 성과
"조서, 언제든 인권침해 위험…구성원 설득해야"
한국일보

여환섭 신임 광주지검장.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이제 검찰은 조서를 버려야 합니다."

지난 11일 여환섭 신임 광주지검장은 취임식에서 파격적인 화두를 던졌다. 피의자나 참고인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를 적은 조서(調書)는 그동안 검찰에는 금과옥조와도 같았는데, 앞으로는 이를 던져 버리자는 제안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인 지난 2006년, 이용훈 당시 대법원장이 판사들을 향해 "검찰의 수사기록을 던져 버려라"고 했던 일갈을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사법부와 검찰 간 갈등까지 유발했던 이 전 대법원장의 발언은 공판중심주의를 강조하는 차원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밀실에서 받은 조서는 공개된 법정에서 나온 진술보다 우위에 설 수 없다"고 했었다. 2020년 여 지검장의 발언 취지도 사실상 같다. 그러나 어느 검사보다도 조서 작성을 많이 해 봤을 자타공인 ‘특수통’인 여 검사장의 공개적인 언급이라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대구지검장 재직하며 구성원 설득... '조서 없는 수사' 첫 도입


여 지검장의 주문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13일 법조계에 따르면, 그가 있던 대구지검은 이미 몇몇 사건을 빼곤 조서 없이 수사하는 업무방식이 자리잡았다. 밖으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검찰이 생긴 이후 이어져 온 오랜 관행에 균열을 낸 변화였다. 조서 작성은 그 효용성에도 불구하고, 공판중심주의라는 시대적 흐름과 동떨어졌고 진술을 왜곡하거나 강요할 우려가 있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여 지검장은 지난해 대구지검장으로 부임한 뒤 반년 동안 검사 회의, 간부 회의, 수사관 회의를 지속적으로 열며 "조서를 없애자"고 설득했다. 이 같은 노력 끝에 지난 4월엔 대구지검 산하 지청까지 공문을 시달, '조서 없는 수사'를 본격 시행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으로 대면 조사가 현실적으로 어려워진 여건도 새 업무 방식이 뿌리를 내리는 데 일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구지검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검사와 수사관, 실무관이 한곳에서 근무하는 구조가 기존의 업무 관행을 좀처럼 바꾸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라고 판단, 검사와 수사관을 아예 공간적으로 분리한 것이다. 이른바 '공판준비형 검사실'로 개편하는 방안이 대구지검 여성아동범죄조사부(여조부)를 대상으로 실시됐다. 검사 업무의 초점을 △기록 검토 △물증 확보 △공판준비 등에 맞췄고, 피의자나 참고인 등과의 기계적 문답이 기록되는 조서가 사라진 자리는 면담이나 메모, 영상 녹화 등이 메웠다.

인권침해 우려 낳던 조서 폐지하니 미제율도 '뚝'


성과는 꽤 가시적이었다. 5월 한 달간 357건의 사건을 처리하며 조서를 작성한 경우도 19건에 그쳤는데, 구조 개편을 한 6월에는 이마저 597건 중 1건으로 줄었다. 업무 효율도 늘었다. 지난 6월 8일 여조부 내 29건이었던 장기 미제사건(수사기간 3개월 초과)은 한달 여 만에 9건으로 대폭 줄었다. 5월에서 6월 사이, 월별 배당 사건 처리율도 78.2%에서 103.1%로 증가했다.

한국일보

올해 상반기 대구지검 여성아동범죄조사부에서 실시된 '조서 폐지 및 공판준비형 검사실 개편' 시범실시 결과. 그래픽=박구원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대구지검의 이러한 변화는 검사들 사이에선 '대구 실험'으로 회자되고 있다. 모두가 공감해 왔지만 막상 실행하긴 힘들었던 업무 프로세스의 변화를 구성원 설득과 자발적 개편으로 현실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간부급 검사는 "증거가 이미 충분한 상황에서 부인하는 피의자를 불러 캐묻고 조서를 작성하는 것도 넓게 보면 인권 침해"라면서 "주목할 만한 실무 개혁"이라고 평가했다.

여 지검장은 한국일보와 통화에서 "유럽연합(EU) 등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채택하고 있는 국제적 표준을 따른 것"이라고 했다. 그는 "법정에서 증거로서의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됐지만 검찰 실무에선 조서를 주요 증거처럼 여겼고, 그 때문에 무리하는 경향이 있었던 게 사실"이라며 "조서를 작성하는 한, 인권침해의 위험성은 언제든 있다"고 지적했다.

대검ㆍ법무부도 주목... "실무자 자발성이 중요"


대검찰청도 주목하고 있다. 대구지검으로부터 시범 실시 및 성과를 보고받은 대검은 지난달 30일 "대구지검 1차장 산하 모든 수사부서(형사 1~4부 및 여조부)에 확대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취임 전부터 "필요한 조서만 받으라"고 강조해 온 윤석열 검찰총장도 이런 변화를 반기고 있다고 한다. 지난 2월 부산고검 방문 현장에서 윤 총장은 "이제는 더 이상 조서 작성 수사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을 지체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법무부 입장도 다르지 않다. 최근 공개한 검찰청 직제 개편안에 '조서 없는 수사환경 확립'과 '공판준비형 검사실' 개편을 담은 게 대표적이다.

다만 이런 변화는 '실무자들의 자발성'에 토대를 둬야 한다는 게 검찰 내부의 분위기다. 여 지검장은 "일률적으로 뭘 어떻게 하라고 하면 결국 역효과만 난다"며 "수사는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것이라, (법 집행이라는) 실무를 가볍게 생각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서로를 벤치마킹하고 배우면서 전체 시스템이 바뀌는 방향이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여 지검장은 이제 막 부임한 광주지검에서도 다시 구성원 설득에 나서겠다고 했다.

최동순 기자 dosool@hankookilbo.com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