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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그런 청춘'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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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과 장애의 경계에 선 청년의 한국사회 관찰기
한국일보

'청춘'이라는 단어는 '건강' '젊음' '열정'을 전제한다. 만일 이 '조건'을 갖추지 못한 청년은 충분히 '청춘'일 수 없는 것인지, 저자는 묻는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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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각종 알바를 섭렵하는 열정과 도전정신, 배낭 하나 메고 언제라도 훌쩍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자유로움, 실패한 연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술과 눈물로 밤새우는 낭만 같은 것들이 청춘이라는 단어의 주석으로 달릴 것이다. 그런데 만약 알바도, 여행도, 연애도, 술도 자유롭게 누리기 어려운 청년이 있다면, 그의 청춘은 과연 어떻게 그려야 할까.

자가면역질환 중 하나인 크론병을 앓고 있는 20대 청년 안희제에게, 청춘은 그런 것들로 설명될 수 없다. 염증성 장 질환인 크론병을 앓고 있는 그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겨우’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가 쓴 책 ‘난치의 상상력’은 ‘아픈 몸’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20대 청년의 ‘청춘 고발기’이자, 질병에 대한 납작한 상상력을 지닌 대한민국을 비판한 보고서다.

2014년 7월 안희제는 크론병을 진단받는다. 소화기 계통의 자가면역질환 중 하나로 소장부터 대장까지, 소화기의 입구부터 출구까지 염증이 생기는 병이다. 복통과 설사, 식욕감소와 장출혈 등의 증상이 동반된다. 치료제도 없다는 이 난치성 질환을 진단 받은 건 스무 살 때였다.

도서관에서 책 정리하는 일을 하다가도 팔 근육에 염증이 생길 만큼 일상생활에 치명적이지만, 더 골치 아픈 문제는 겉으로 보기에 ‘충분히 아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항문에서는 거의 매일 피가 나고 잦은 복통과 두통에 시달려야 하지만 이것들 대부분 ‘타인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고통이다. 다른 내부 장애를 수반하지 않는 이상 장애 등록도 되지 않기 때문에 학교의 장애학생지원센터의 특수교육 대상자로 등록되지 않는다. ‘제도’에 잡히지 않기 때문에, 아픈 상황에서 스스로의 아픔을 증명하는 일은 온전히 당사자의 몫이다.

한국일보

난치의 상상력. 안희제 지음. 동녘 발행. 340쪽. 1만6,000원


“청년인 듯 청년이 아니고, 장애인인듯 장애인이 아니고, 건강한 듯 건강하지 않고, 남성이길 기대 받지만 충분히 남성일 수 없는” 저자의 복잡한 처지는 그가 대학교 장애인권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더욱 선명해진다.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 동료 옆에서 ‘조금 덜 장애인’인 그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에서 과연 자신의 소속이 어디인지 늘 가늠해야만 한다.

질병과 장애의 경계에 선 그의 일상적 고민은 ‘정상성’과 ‘의료적 관점’에서 얼마나 ‘미달’하는지를 평가해 산정되는 한국의 장애등급제 문제점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여전히 “장애인의 몸보을 의료적 기준과 예산ㆍ행정의 효율을 우선시하는 상황”을 미뤄볼 때 지난해부터 이뤄지고 있는 장애등급제 단계적 폐지는 ‘가짜’라고 꼬집는다.

‘비장애인’과 ‘장애인’ 중 어느 쪽으로 자신을 정체화해야 하는가에 대한 저자의 오랜 질문은, 단순하게 경계를 나누는 대신 “질병이 장애가 아니어도, 심지어 어떤 통증이 질병이 아니어도 그것은 그것대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귀결된다.

이를 위해 우리 사회는 장애와 질병에 대한 폭넓은 상상력를 지녀야 한다. 일회성 휠체어 체험을 하는 공무원이나 장애 아동의 목욕을 돕는 모습을 언론에 홍보하는 정치인의 행동은 장애인의 삶을 전시장 안에 가두는 행위일 뿐이다. 사춘기를 ‘중2병’이라고 지칭하거나 답답한 상황을 ‘암 걸린다’고 비유하고 여러 선택지를 두고 헤매는 상황을 ‘선택 장애’라고 설명하는 것 역시, 질병이나 장애를 나쁜 것으로 전제하는 차별적 사고방식의 답습이다. 특히 코로나19라는, 누구라도 갑작스레 아픈 몸이 될 수 있는 감염병의 시대에 건강한 신체를 기본으로 설정하고 이 기준 바깥의 것들을 희화화하거나 동정하는 사고방식은 더 이상 유효할 수 없다.

책을 펼치면 표지 그림에 대한 상세한 설명부터 시작된다. 시력이 나쁘거나 시각 장애가 있어 표지의 디자인적 요소를 충분히 느낄 수 없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추후 점자 도서나 오디오북이 만들어질 때도 함께 제공된다.

부끄럽지만 많은 책을 읽으면서도 표지 디자인이 누군가에게 독서의 장벽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내 ‘난치의 상상력’이 미처 거기엔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애와 질병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 책도 그래서 세상에 나왔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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