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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7 (금)

우산이 필요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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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서영인의 책탐책틈

디디의 우산

황정은 지음/창비(2019)


한겨레

<디디의 우산>에서 우산은 처음과 끝에, 두 번 나온다. d와 dd가 어릴 적, 비오는 길을 둘은 함께 우산을 쓰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른이 되어 만났고 그때도 역시 하나의 우산을 함께 쓰고 귀가했다. 그리고 소설의 끝에는 다짐처럼, 선언처럼 “모두가 돌아갈 무렵엔 우산이 필요하다”라고 적혀 있다. 쏟아지는 비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는 어떤 것, 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며 d의 우산에 대해 생각했다.

dd가 살아 있었을 때, d의 우산은 물론 dd였다. “dd를 만난 이후로 dd가 d의 신성한 것이 되었다.” dd가 있어서 d는 행복해지자고, 더 행복해지자고 생각할 수 있었다. dd가 사고로 죽고 난 후 그러므로 d는 행복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없었고, dd가 없는 세상은 잡음으로 가득 찼다. d는 dd라는 우산을 잃었다.

그다음의 우산은 환멸이나 혐오였다. 난폭운전을 하는 버스 운전사에게 갑자기 증오가 치밀어 욕설을 하고 버스에서 내린 후 그는 걸어서 강을 건넜다. 역겨움과 분노와 증오와 환멸이, 그를 살아 있게 했고 어딘가를 향해 걷게 했으므로, 그 감정들이 그의 우산이 되었다. 하찮음이라는 우산도 있다. 충돌 한 번에 내동댕이쳐질 만큼 하찮았기 때문에 dd는 여기에 없고 d는 여기에 있다. 존재의 하찮음을 인정해야 여기에 혼자 남아 닳아질 삶의 하찮음을 수긍할 수 있을 터이므로, 그 하찮음은 계속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일종의 우산이다.

그리고 혁명이라는 우산이 있다. dd가 빌린 책을 돌려주기 위해 만난 박조배는 내내 혁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침 그들이 있는 곳은 세월호 1주기가 추모되는 광화문 광장이었다. 그러나 d가 거기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목격한 혁명은 “혁명을 거의 가능하지 않도록 하는 혁명”이었다. 혼잡과 쇄도의 흐름을 따르거나 거슬러 도착했다고 생각한 곳에 거대한 차벽이 가로막은 진공의 공간이 있었다. 차벽이 만든 진공이 사람들의 흐름을 결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택배일을 하는 세운 상가에서 d는 또 하나의 진공을 본다. 차벽의 진공과 달리 앰프에 사용되는 진공관은 흐르는 빛과 신호로 가득 차 있으며 그 흐름이 소리를 전달하고 증폭시킨다. 아직 몰랐을 뿐, 광화문의 진공도 그럴 것이다. 차벽에 가로막힌 무력한 흐름 같았지만, 온통 소음과 잡음처럼 들렸지만, 진공과 그 주변에서 사람들은 흐르고 있고 그 흐름으로 하찮음에 저항하고 있으며 진공관처럼 뜨겁다.

우산을 쓰고 폭우 속을 걸으면 우산으로 가릴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미 젖을 대로 젖은 신발과 바짓단을 추스르며 우산의 필요를 생각한다. 쏟아지는 비를 가리거나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빗길을 계속 걸어가기 위해, 비와 함께 어디로든 가기 위해 우산이 필요하다. 싸늘한 길이지만 가다 보면 뜨거워지기도 할 것이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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