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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7 (금)

역사에도, 기억에도 없는 ‘70만명’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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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브로커들: 일제강점기의 일본 정착민 식민주의 1876∼1945

우치다 준 지음, 한승동 옮김/길·3만8000원

19세기 말부터 1945년까지 조선 땅에 정착한 일본인 정착민 70만명 조명

식민 권력의 ‘대리인’이자 ‘앞잡이’ … 친일파와 동맹이자 경쟁 관계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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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1940년대 일본 정착민과 ‘조선인 엘리트’ 여성들이 관동군에게 줄 위문품을 모으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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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일본에서 발간된 여행서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부산까지 가는 데는 고작 15엔밖에 들지 않으며, 미국에 가는 비용으로 조선 노동자를 헐값에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고, 자기 사업까지 벌일 수 있습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자국민의 조선 이주를 적극적으로 독려했다. 출국 심사를 면제해주고 곧이어 여권 발급 심사마저 폐지했다. 이렇게 한층 넓어진 조선으로 가는 문을 가장 먼저 통과한 건 소작농, 노동자, 가난한 농부 등 일본의 하층민이었다. 이들은 정부의 전폭적 지원, 식민지 본국(일본)의 국민이라는 우월적 신분을 이용해 조선에서 한몫 크게 잡으리라는 ‘코리안 드림’을 품고 대한해협을 건넜다. 19세기 말부터 일본이 패전한 1945년까지 조선에 정착한 ‘일본인 정착민’들은 70만명에 달한다.

새 책 <제국의 브로커들>은 이 ‘70만명’에 주목한 책이다. 지금껏 일제강점기는 조선 총독부의 식민지배와 이에 맞서는 조선 민중이라는 이분법적 대립구도로 설명되어 왔다. 그러나 이렇게 짜인 구도 안에서는 70만에 달하는 일본인 정착민의 존재는 드러나지 않는다. 지은이 우치다 준 스탠퍼드대 동아시아연구센터 소장의 문제의식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그는 서문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그들(일본인 정착민)은 일본의 공식적인 기억에서 거의 모두 사라졌다(…) 평범한 일본인들은 주로 (국가 전쟁)폭력의 가해자로서가 아니라 희생자로 간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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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8월15일 경성(京城) 성내 일본인 거류민들이 조직한 자치조직단체인 ‘경성거류민단’ 해산 당시 일본인 지도자들의 모습. 도서출판 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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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사라졌던 70만명을 이 책은 집요하게 소환한다. 지은이는 일본인 정착민의 비망록과 전기, 구술·서면 인터뷰, 각종 언론보도와 식민지 경찰의 비밀 보고서까지 긁어모아 일제 식민통치 시기 조선 땅에서 이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규명한다. 제목이 미리 말해주듯, 지은이가 규정한 이들의 정체성은 ‘제국의 브로커’다. 브로커란 양자를 중개해 양측으로부터 수수료를 받는 자. 지은이는 일본인 정착민을 “식민 권력의 대리인(agent)이나 앞잡이(pawn) 역할”을 하는 “이익 추구형 사고의 소유자”로 규정한다. 이들은 자신의 돈과 권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라면 평소 비하하던 ‘조선인 엘리트’(이 책에서는 친일부역자를 이렇게 칭한다)와 결탁하는 일도, 서슬 퍼렇던 본국에 집단으로 의견을 내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식민통치의 ‘풀뿌리 요원’으로서 본국(일본)의 방침을 지역사회에 전파하고 반대로 지역사회에서 파악한 동향과 이를 토대로 설정한 식민통치의 방향을 본국에 거꾸로 제안하기도 한다. 이 같은 방식으로 일본인 정착민들은 “국가폭력과 공모관계를 맺었다”는 게 지은이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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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정착민 고바야시 겐로쿠가 설립한 ‘초지야 백화점’ 전경. 그는 조선 땅에 주둔하던 일본군 장교와 관리에게 모자와 제복을 팔아 큰 돈을 벌고 초지야 백화점을 세운다. 조선인 근로자를 다수 고용하며 총독부의 ‘내선융화’를 충실히 실현한다. 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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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일제강점기 전후(1876∼1945) 총 69년을 3개의 시기로 나눠 시기별 브로커의 위상과 역할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밝힌다. ①총독 통치(1910년)가 시작되기 전 혹은 그 직후 일본인 정착민들의 ‘출현기’ ②1919년 3·1 운동 직후 사이토 총독의 문화정치 동맹세력으로 부상한 ‘활동기’ ③1930∼1940년대 전시체제 아래서 활동영역을 한반도 경계 너머까지 확장하면서 사실상 ‘국가기관’의 역할을 했던 시기다.

‘출현기’까지만 해도 일본인 정착민들은 주로 상업 영역에서만 목소리를 냈다. 이들은 일본에서 생산한 면제품을 팔거나, 쌀 거래업을 하는 등 비교적 정상적인 경제활동으로 돈을 벌기도 했지만 적지 않은 수가 “조잡한 상품을 팔거나, 불법적인 인삼거래나 조선 동전 위조 사업처럼 사기에 가까운 일”을 했다. 한밑천 잡겠다고 식민지에 왔기에 이득에 관해서라면 무척이나 민감했다. 조선 땅에서 중국 제국주의가 부상하던 시기 위기감을 느낀 이들은 “남대문의 아침 시장은 완전히 중국인들이 지배”하고 “중국인 상인이 일본인을 때려 눕히고 자기 자리라고 주장할 것”이라며 본국에 영사경찰 증원·일본군 급파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보냈다. 일본과 조선 사이 교역 활동의 편의성과 안정성을 위해 직접 본국을 찾아 경부선 철도 건설을 추진해달라고 ‘로비’를 하기도 한다. 이 시기에 명성황후 시해 사건도 발생했는데, 여기에도 상인·교육자·언론인까지 다양한 일본인 정착민이 ‘별동대’로 가담했다고 지은이는 전한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본인 정착민들의 입장에서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관·민 협력사업”이었다는 것이다.

‘출현기’만 해도 드물게 총독부와 ‘협업’했던 일본인 정착민들은 1919년 3·1운동 이후 상시적 ‘동맹관계’로 부상한다. 3·1운동을 통해 표출된 조선인의 타오르는 분노에 겁먹은 총독부가 통치 방식을 유화책으로 선회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재임한 사이토 마코토 총독은 ‘내선융화’의 관점을 제시하며 교육·사업·정치 등 다방면에서 조선인에게 더 많은 기회를 보장하는 이른바 ‘문화정치’를 시도한다. 이 정치의 성패는 조선인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데 있기에 사이토는 각종 위원회를 구성해 ‘조선인 엘리트’와 일본인 정착민을 ‘비공식 고문’으로 위촉한다. 일본인 정착민 22명은 ‘조선정보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돼 조선인 사회 동향을 상시적으로 보고하는 정보원 역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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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창씨 개명’ 공고. 일본인 정착민은 지역사회 조선인에게 창씨 개명의 이점을 설득하고, 이름 짓기까지 도와주는 등 총독부 정책을 적극 지원했다. 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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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만주사변 이후부터 식민통치기가 끝나는 전까지의 시기, 일본인 정착민은 단순 자문을 넘어 ‘국가기관’의 부분으로 흡수된다. 만주사변 이후 열강과의 무력 대결에 대비해 식민정부는 새로운 차원의 단결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조선인 대상 ‘교화(moral suasion)’를 시작한다. 이때 일본인 정착민은 관료조직과 손을 잡고 교화의 대리인이자 풀뿌리 조직으로서 사회를 관리한다. 1940년대 초 약 70만명에 이르렀던 일본인 정착민들 가운데 4분의 1이 어떤 형태로든 식민정부에 고용돼 있었다고 한다.

지은이는 말한다. “조선반도에 가장 먼저 발을 들여놓은 것도 일본의 민간인들이었고, 가장 마지막에 그곳을 떠난 것도 그들이었다”고. 그들은 제대로 된 산업혁명도, 근대화도 없이 팽창에 나섰던 일본이 잉여 자본 대신 활용한 일종의 ‘인간 자본’이었으며, 정착민 식민주의(settler colonialism)의 주체이자 수혜자였고, ‘조선인 엘리트’의 동맹군이면서도 이들과 제국의 ‘2등 국민’ 자리를 두고 피 터지게 다투는 경쟁자였다. 역사의 좌표에서 사라진 불안정한 ‘변수’ 일본인 정착민. 이들을 인지하고 이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다시 보는 일은 8·15 광복을 보다 입체적으로 해석하는 데 보탬이 될 것이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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