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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21이 사랑한 작가 권여선① “늙은 주정뱅이의 비참을 기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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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21이 사랑한 작가들]

한겨레21

월간 <채널예스> 이혜련 사진가 제공


작가 권여선(55)은 내면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올려 밥을 짓고 국을 끓이는 작가라고 말할 수 있다. 우물이란 무엇인가. 어떤 작가는 아이템을 정하고 관련 인물들을 취재한 결과물을 토대로 작품을 쓰는 반면, 권여선은 자신과 가족, 친구 등 주변에 대한 끈질긴 관찰과 말 걸기를 통해 얻은 정보를 비틀고 뒤섞은 뒤 씨줄과 날줄 삼아 작품을 엮는다. 등단작 <푸르른 틈새>부터가 그렇다. 그는 등단 전 피시(PC)통신의 세계에 푹 빠져 지냈는데, 모뎀 접속이 끊길 때마다 심심풀이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밤늦게까지 컴퓨터 앞에 붙어앉아 있으면 술을 먹고 싶어 하는 또 하나의 나는 초조한 듯 방 안을 서성인다. 그 서성임을 내 무릎 위에 고정시키기 위해 나는 컴퓨터와 교제하는 동안엔 앉은자리에서 술을 마실 수 있도록 산뜻하게 도련된 컴퓨터책상 모서리에 소주병과 잔을 놓아둔다. … 아무리 하찮은 대상에라도 정신을 잃을 만큼 몰입하는 나를, 나는 아직도 좋아하는 급진적인 경향이 있다. -<푸르른 틈새>

“저는 활자화된 자료만 봅니다”

첫 작품에서 시작해 1980년대 학생운동권 이야기를 다룬 <레가토>에 이르기까지 등장하는 인물들을 조합하면 권 작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렴풋한 윤곽이 그려진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1960년대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어릴 적엔 부산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1년에 열 달은 배를 타는 외항선원이었으며 어머니는 요리에 소질 있는 자상한 분이었다. 본인은 고등학교 때는 수학을 잘했고 디스코텍을 다녔다. 대학 국문과에 진학해 운동권 서클에서 활동했다. 지금은 술과 안주를 사랑하는 시민으로서 술 마신 다음날 뜨거운 물에 봉지커피를 타 후루룩 마신 뒤 해장하러 가거나 집에서 직접 해장한다.

이런 자전적 이야기 속에 권여선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고뇌하고 부대끼고 성장한다. 이를 두고 작가 정여울은 “작가 권여선은 ‘외부의 서사’가 아니라 ‘내면의 서사’로 작품을 직조하고 있다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런 권여선의 작가로서 태도를 갖춘 인물이 실제 그의 소설에도 나온다. 네 번째 소설집 <비자나무 숲>에 수록된 단편 ‘팔도기획’이다. 자그마한 출판사에 일거리를 찾아 온 윤 작가는 대학 국문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을 1년 다닌 인물이다. 닭발로 돈을 번 요식업체 사장의 자서전 대필 작업에 투입된 그는 인터뷰를 따러 가자는 제안을 이렇게 거부한다.

“저도 소설을 쓸 때 취재를 하고 자료 수집도 합니다. 하지만 인터뷰나 녹취는 못합니다. 저는 활자화된 자료만 볼 수 있어요. 대상을 직접 보거나 만지거나 그 소리를 듣거나 하면 글을 쓰지 못합니다. 그때의 생생한 인상이나 감각이 저를 혼란에 빠뜨려서 어떤 단어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권여선의 작품은 상당 부분 ‘후일담 소설’이기도 하다. 작가도 이런 규정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서면 인터뷰에서 “동의합니다”라면서도 뒤에 출간한 <레가토>를 두고 “운동권의 ‘후일담 소설’이란 말은 다소 폄하의 의미를 내포한 말인데, 저는 운동권이든 아니든 그저 모든 소설이 결국은 ‘후일담’이 아닌가 생각하며, 그 협소한 규정에 갇히지 않으려 할 따름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작가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무엇이었습니까.

“제가 대학원 박사과정 시험을 보는 날 아침에 아버지께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일입니다. 제가 시험을 망칠까봐 가족들이 시험이 끝날 때까지 알리지 않았는데, 그런 배려에도 불구하고 저는 시험에서 떨어졌습니다. 그 후로 더는 어떤 시험도 보지 않기로 결심했고, 그래서 시험 안 보는 소설가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5·18 광주와 인혁당 사건을 쓴 뒤

그의 작품 세계에서 첫 번째 큰 변곡점은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한 사회성 짙은 작품을 잇달아 내놓으면서 처음 찾아온 것으로 보인다. 권여선 소설의 두 번째 결이다. 등단 16년 만인 2012년 1980년대 학생운동권에 몸담았던 이들의 순수와 폭력성, 그리고 5·18 광주 민주화운동 얘기를 담은 <레가토>를 내놓았다. 2년 뒤엔 1974년 일어난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다룬 <토우의 집>을 발표했다. <레가토>는 학생운동권 내부의 그릇된 성폭력 행태를 그대로 까발렸다는 점에서 일부 시비가 붙었다. 이에 대해 권여선은 2018년 “왜 운동권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난 것처럼 썼느냐 하는데, 사실 그런 일들이 일어났어요. 설사 일어났더라도 그렇게 소설에 써서 운동권의 명분을 훼손하고 그러느냐 개탄하는 의견도 있던데, 저는 훼손당할 게 있으면 훼손당해야 한다는 입장”(<악스트>(AXT) 인터뷰)이라고 밝힌 바 있다. 작가한테 이 세상에서 남성 성폭력이란 그야말로 진절머리 나는 일이다.

맥줏집을 나와 전철역을 향해 가면서 그녀는 살짝 진저리를 쳤다. 꼼장어 토막에서 밀려나오는 투명하고 길쭉한 내장들처럼, 남자들 속에 숨어 있다 슬금슬금 비어져나오는 왜소하고 더러운 내면의 고추들을,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보아왔고 아마 오래도록 보게 될 것이었다. 견딜 수 없이 지긋지긋했다.

-<안녕 주정뱅이> 중 단편 ‘층’

*21이 사랑한 작가 권여선② ‘내면의 우물에서 길어올린 밥’으로 이어집니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9102.html

*21이 사랑한 작가들 모아보기
http://h21.hani.co.kr/arti/SERIES/2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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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의 안주

권여선은 누가 뭐래도 ‘술과 안주’의 작가다. 그의 소설 곳곳에 질펀하게 혹은 가슴 시리게 등장하는 술과 안주의 향연은 읽는 이로 하여금 끝없는 식욕을 불러일으킨다. 작가가 이를 집대성한 작품이 <오늘 뭐 먹지?>다. 이 책은 표지에 ‘권여선 음식 산문집’이라는 외피를 쓰고 있으나 작가는 ‘들어가는 말’에서 “내게도 모든 음식은 안주이니, 그 무의식은 심지어 책 제목에도 반영되어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를 줄이면 ‘안주’가 되는 수준이다. 이 책 제목인 <오늘 뭐 먹지?>에도 당연히 안주란 말이 생략되어 있다”고 실토한다. 이 책은 사계절에 맞춤하게 소주와 함께 먹을 만한 안주들을 소개한다. 나들이 가기 좋은 봄엔 순댓국과 만두, 김밥을 작가만의 맛을 돋우는 방법과 함께 소개하고 무더운 여름용으로는 냉면과 물회, 땡초, ‘까죽나물’을 맛깔나게 먹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그래서 권여선 작가한테 특별히 부탁했다. 지루한 장마가 끝나고 <한겨레21> ‘주정뱅이 독자’들이 소주 한잔하며 즐길 수 있는 특급 안주 비법을 소개해달라고 했다. ‘술과 안주의 장인’ 권 작가가 독자에게 추천하는 그만의 레시피를 소개한다.

“요즘 논우렁이살에 맛을 들여 이것저것 해먹고 있습니다. 논우렁이살을 넣은 강된장도 맛있지만, 안주로 먹으려면 논우렁이살에 여러 가지 채소를 넣고 매콤새콤하게 무쳐 먹으면 골뱅이보다 더 쫄깃하고 담백하고 맛있습니다. 비 오는 날이면 논우렁이살을 넣고 부침개를 해 먹어도 좋아요. 김치전이나 부추전도 좋지만, 저는 주로 냉장고에 있는 아무 채소나 툭툭 썰어 넣고 논우렁이살을 섞어 부칩니다. 그러니까 논우렁이살과 아무 채소만 있으면 무침과 부침, 두 가지가 다 가능합니다.”

늘 가슴속에 품고 사는 ‘내 인생의 한마디’는 무엇인가요.

“술을 좀 줄이자. 죽을 때까지 먹게.”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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