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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日에 끌려간 조선 도공들, 그리움 사무친 `恨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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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애달프게 엄마를 부르짖는 아이의 울음에 콧잔등이 시큰하다. 고향 산천을 그리는 실향민의 눈빛도 마찬가지다. 500년 전 이 땅에서 나고 자랐지만 이곳을 다시 밟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1592년 임진년과 1597년 정유년, 왜구가 난을 일으킨 해 수많은 실향민이 일본 본토로 끌려 나갔다.

그중에는 그릇 따위를 제법 잘 빚는 도공이 많았다. 조선 도자기가 귀한 재물임을 알고 장인들을 조직적으로 납치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본 지방 영주에게 귀한 대접을 받았다. 누구는 관직을 했고, 또 누구는 도자기의 신으로 추앙받았다. 하지만 고향을 향한 그리움은 뼈에 사무쳤다. 신간 '조선가'는 실향민이 돼야만 했던 이들에 대한 기록이다. 정광 고려대 문과대학 명예교수가 썼다.

일본에 끌려간 가장 유명한 도공은 박평의다. 정유년 피랍된 박평의는 사쓰마에서 평생 도자기를 빚는 데 매진했다. 사쓰마도기는 일본 명품 도자기의 상징이 됐고, 박평의는 사쓰마 영주에게 녹봉을 하사받았다. 또 다른 피랍자 심당길은 그 후예가 지금까지도 15대 후계자로 남아 도자기를 빚는다. 도공의 공(功)으로 사쓰마 지역 경제가 크게 성장했다. 17세기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유럽 전역에 일본 도자기 열풍이 불었다. 조선 도공은 그 시발점이다. 부자가 된 도공들이 공격당하자 영주들이 조선인에게 향사의 직위를 내려 보호한 일도 있었다.

이국(異國)의 산해진미도 고향 땅 어머니의 삼첩반상을 떨칠 수는 없었다. 배는 채워도, 주린 영혼은 어쩔 도리가 없다. 도공들이 일본 땅에서 조선의 노래를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책과 동명인 '조선가'가 그 예다. 피랍 도공들이 부른 '조선가'는 조선시대 중인이 썼던 흔적이 남았다. 저자는 "타향에서도 조선인으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고 일본 사회에 문화적 영향력을 남긴 증거"라고 했다.

근대화에 대한 주장은 다소 거칠다. 도공이 유출돼 조선이 근대화에 실패했고, 반면 일본은 도자기 수출로 경제 성장과 메이지유신에 성공했다는 부분이 대표적이다. 청나라 침공을 받을 때조차 망해버린 명나라 황제를 기리는 만동묘에서 제사를 지낸 조선 유생들이 경제 성장을 이끌었을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서양과 접촉을 이어갔던 일본의 경제 성장을 도자기 하나로 환원하는 것 역시 마뜩잖다. 그럼에도 도공이 남긴 망향가(望鄕歌)는 어찌나 구슬픈지. '개야 짖지 마라 (중략)/ 호고려(일본에서 조선을 부르던 말) 님이 계신 곳에 다녀오련다/그 개도 호고려의 개로구나/ 듣고 잠잠하노라'. 반(半)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락 하나하나에 사무친 그리움의 잔향이 배어난다.

[강영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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