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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모두가 외면한 마지막 한국인 전범 "한 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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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포로감시원 이학래씨 BC급 전범으로 사형선고

뉴스1

태평양전쟁 한국인 BC급 전범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인 이학래씨. <출처=NHK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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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강민경 기자 = 일제 강점기 일본군 포로감시원으로 징집됐다가 'B·C급 전범'이라는 오명을 쓴 한국인 이학래(95)씨. 전후 75년인 현재 그는 한반도 출신 전범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다.

이씨는 도쿄신문과의 14일자 인터뷰에서 "같은 처지였던 이들이 모두 죽었다. 가장 젊은 나만 남아있다"면서 일본 정부로부터 보상을 받아 먼저 간 동료들의 한을 풀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 포로 감시하다 전범 멍에, 고국행도 포기 : 전남 출신인 이씨는 1942년 일본군 포로 감시원으로 징집돼 태국 수용소에서 영국인·호주인 포로를 감시하는 일을 맡았다.

패전 후 이씨는 군사재판에서 B·C급 전범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B·C급 전범이란 연합국이 선포한 국제 군사재판 조례에 따라 B항 전쟁범죄, C항 반인륜범죄 등의 죄목을 추궁받은 이들을 말한다.

옥중인 1955년에는 BC급 전범이 된 한반도 출신자들을 모아 동진회(同進會)를 결성했다. 이씨는 나중에 20년형으로 감형을 받고, 11년간 구금 돼 있다가 1956년 가석방됐다.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일제의 부역자라는 비난이 쏟아지자 가족들의 처지를 생각해 고국행을 포기했다.

◇ 일본인으로도, 한국인으로도 보상 못 받아 : 하지만 그는 일본인도 아니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한반도 등 옛 식민지 출신은 일본 국적을 잃었다.

그래서 보상도 받을 수 없었다. 일본 국적의 전직 군인과 군속은 보상을 받았지만, 이씨와 동료들은 대상에서 제외됐다. 그렇다고 한국인으로서 보상을 받을 수도 없었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이후 일본 정부는 한국인에 대한 보상이 해결됐다는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씨는 일본에서 동진회 동료들과 택시회사를 차려 생계를 꾸렸다. 하지만 일본에 의지할 친구도, 친척도 없는 동료들은 삶을 비관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마음의 병을 얻었다.

◇ 기댈 건 입법…시간 많지 않아 : 1991년 이씨는 동료들과 함께 일제가 강요한 전쟁 피해자임을 인정받기 위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소했다. 최고재판소까지 갔지만 결국 기각됐다.

기댈 건 입법이었다. 하지만 관련 법안은 의회의 우선순위 밖에 있다. 전범 한 명당 300만엔을 지원하는 구제법안이 지난 2008년 야당인 민주당에 의해 국회에 제출됐지만 여당과 합의가 되지 않아 이내 폐기됐다. 8년이 지나 지원금액을 260만엔으로 낮춘 법안도 마련됐지만 제출되지 않았다. 반대하는 의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씨에게도 남아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 외출할 땐 휠체어에 의존하고, 몸 상태가 무너지는 날도 잦다. 그는 "내가 사형선고에서 살아남은 건 이 문제에 대응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본인 여러분의 힘을 빌어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다"고 말했다.
pasta@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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