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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9 (월)

성차별에 순응하지 않고 투쟁한 사람들…그들이 세상을 바꿔 놓았다 [전희상의 런던 책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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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참정권 운동 투쟁기

[경향신문]

경향신문

헬렌 루이스
<고분고분하지 않은 여자들>

2018년 4월 런던 의회광장에서 여성참정권 법제화 100주년을 기념해 밀리센트 포셋의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청원·시위 등을 통한 합법적 여성참정권 운동을 주도했던 포셋은 이렇게 처칠, 간디 같은 역사적 인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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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의회광장 최초의 여성 동상을 환영했지만 에멀라인 팽크허스트가 아닌 포셋이 선정된 것에 아쉬움을 표시하는 이들도 있었다. 팽크허스트가 이끌던 여성사회정치연합은 말이 아닌 행동이라는 모토 아래 유리창 깨기나 소규모 방화와 같은 비합법적·전투적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느냐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팽크허스트 그룹의 적극적 투쟁은 당시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고 오늘날에도 인지도 측면에서 팽크허스트가 포셋을 압도한다.

1인 동상이 운동의 다양성과 풍부함을 사상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는 근본적인 지적도 있었다. 가디언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던 헬렌 루이스의 <고분고분하지 않은 여자들(Difficult Women)>에 따르면 운동을 주도한 이들의 정치적·사회적·문화적 배경은 그들의 투쟁 방식만큼이나 다채로웠다.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였던 에밀리 데이비슨은 투표권조차 없던 자신의 주소를 ‘의회’라 기록하기 위해 인구조사 전날 의회 건물 벽장으로 숨어든 창의적 투쟁으로 유명했다. 반면 여성참정권을 인정하라며 자유당 유세현장에서 큰 소란을 일으킨 애니 케니는 열살 때부터 공장에서 일한 노동계급 출신의 지도자였다.

루이스에 따르면 다양한 기질과 배경을 가진 이들을 한데 묶은 것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만연한 성차별 폐습에 고분고분하게 순응하지 않는(difficult) 태도와 행동이었다.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번역어는 썩 만족스럽지 않다. 억압적 현실에 대한 분노와 저항은 잘 표현하지만 이러한 이들에 대해 특히 남성들이 역설적으로 갖게 되는 두려움을 드러내지는 못해서다. 하지만 딱 떨어지는 번역어를 찾느라 고심하는 대신 이 책의 마지막 장 “고분고분하지 않은 여성 선언”의 일부를 인용하는 것이 낫겠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여성은 … 무례하지도 옹졸하지도 비열하지도 않다. 난처한 상황을 굳이 피하지 않을 뿐이다. 필요할 때는 강하게 요구하고 고집스러워질 수 있다. ‘원래 그렇다’는 설명에 만족하지 않는다. 친절하고 넉넉하지만 순응하지 않는다. 가족의 행복이 나의 행복에 우선하지 않는다. 걷는 데 편한 신발을 신고 내킬 때 즐거운 마음으로 화장한다. 쩍벌남이 옆에 앉았다고 다리를 다소곳이 모으지도 않는다.” 애플의 광고 ‘다르게 생각하라’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적응하지 못하고 반항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이들. 그들은 세상을 다르게 본다. … 결코 그들을 무시할 수 없다. 세상을 바꾸어놓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여성 참정권운동에 참여했던 고분고분하지 않은 여성들의 투쟁이 없었다면, 그들이 성취해낸 세계사적 변화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제헌헌법이 여성 참정권을 제대로 보장할 수 있었을까. 우리 모두 이 고분고분하지 않은 여성들에게 크게 빚지고 있다.

전희상 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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