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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아무튼, 주말] 물 ‘너무’ 만난 샤인 머스캣·복숭아…달콤함 사수 대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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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 장마에 단맛 잃은 여름 과일

“마트에서 2만9900원에 샤인 머스캣(포도 품종) 1㎏짜리 한 상자를 샀는데 너무 싱거웠어요. 복숭아도, 수박도 무(無)맛. 결국 복숭아는 병조림으로, 수박은 설탕 넣어 주스로 갈아 먹었어요.”

과일 마니아 이다혜(43)씨에게 8월 중순은 1년 중 가장 행복한 철이었다. 수박, 복숭아, 포도, 자두…. 달콤한 여름 과일에 둘러싸여 밥보다 과일을 더 많이 먹을 정도였다. 올해는 사정이 달라졌다. 역대 최장 장마 탓에 과일 당도가 뚝 떨어졌기 때문. 게다가 수해로 주요 과일 산지가 타격을 입어 수급도 달리는 상황이다.

조선일보

지난 9일 서울의 한 대형 마트 과일 코너 모습. 기록적인 폭우로 일조량이 부족해 과일 당도가 예년 여름보다 확연히 떨어져 과일 판매량이 전반적으로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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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도 떨어지고 출하량 줄어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 도매업체 '중앙청과' 이재희 과일팀장은 "수박은 당도가 예년 평균 12~13브릭스(당도 단위, 100g 용액에 들어간 당 함량)에서 올해는 11브릭스, 복숭아는 평균 14~15브릭스에서 11브릭스 안팎으로 떨어졌다. 몇 해 사이 고당도 과일의 신흥 강자가 된 샤인 머스캣은 17~18브릭스에서 14~15브릭스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했다. 이 팀장은 과일 경매사로 전국 산지 정보를 꿰뚫고 있는 과일 전문가.

그는 "노지 수박의 경우 충북 단양 어상천, 전북 고창 등 주산지가 수해 직격탄을 맞아 전년 대비 시장 반입량이 40% 줄어들었고, 복숭아도 낙과와 병충해가 많아져 출하량이 20~30% 줄었다. 비가 와 품질도 예년만 못하다. 하우스 재배를 하는 멜론이 그나마 예년 당도(13~15브릭스)를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 관계자는 "일괄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전반적으로 폭우 때문에 과일 생산량이 줄었고 날씨가 덥지 않아 과일 수요도 예년 같지 않다"고 했다. 한 대형 마트 관계자는 "작년 대비해 매출이 10~20% 줄었다"며 "'장마철 과일은 맛이 없다'는 인식이 워낙 강해 소비자들이 선뜻 사지 않는다"고 했다.

생산량이 적은 만큼 남아 있는 과일을 찾아 선점하려는 유통업체 바이어들의 경쟁도 치열하다. 이마트 이진표 복숭아 바이어는 "작년까진 경기도 이천, 여주 등에서 주로 사들였는데 올해 이 지역에 비가 계속 내리는 바람에 대체 산지를 찾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다"고 했다. 며칠 전엔 서울에서 시작해 하루에 경기도 이천, 강원도 원주, 경북 영천, 전북 전주를 돌았다. 말 그대로 '복숭아 찾아 삼만리'였다.

비보다 햇빛 적은 탓

장마철 과일 당도가 떨어지는 이유는 뭘까. 식품공학자 최낙언('맛의 원리' 저자)씨는 "장마 때 과일 당도가 낮은 것은 과일이 물을 많이 머금어서라기보다는 일조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비보다는 햇빛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얘기.

최씨는 "과일의 당은 나뭇잎에서 광합성으로 만들어진 포도당이 과당 같은 형태로 전환돼 열매(과일)로 전달돼 축적된다. 광합성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햇빛인데 장마 때는 일조량이 충분하지 않아 광합성이 부족하다. 자연히 당도도 떨어지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빗물을 지나치게 빨아들여 과일이 밍밍해지는 것은 아닐까. 그는 "식물은 광합성에 필요한 일정한 수분을 삼투압 원리로 빨아들이지 필요 이상을 흡수하지는 않는다. 이론적으로 볼 때 비가 온다고 해서 과일이 물을 더 많이 흡수한다고 보기는 무리"라고 했다.

'한국 과일이 유난히 달다'는 주장도 많다. 사실일까.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국승용 농업관측본부장은 "한국 사람들이 단 과일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 고당도 위주로 품종을 개발해 왔다"며 "그 결과 열대 과일을 제외하고 딸기, 수박 등 대부분이 세계적으로 당도가 높은 편"이라고 했다.

최근 이어지는 이상 기후가 과일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국 본부장은 "올해는 장마 말고도 과일 꽃이 피는 5월에 늦추위가 와서 냉해가 있었다"며 "근래 몇 년 동안 5월에 늦추위가 오고, 상대적으로 6월보다 7월이 시원해지는 등 이상 기후가 이어지고 있다"며 "이런 기후변화가 과일 지형도를 변화시킬 것 같다"고 했다.

이마트 관계자는 “기후에 영향을 덜 받는 과일 품종을 찾는 게 새로운 임무가 됐다”며 “올해는 반사판 원리를 이용한 타이벡(고밀도 폴리에틸렌 섬유)을 과수 아래에 설치해 수분 흡수를 막고 일조량을 늘리는 방식으로 재배한 옥천 ‘타이벡 복숭아’, 장마철 당도 변화가 작은 씨 없는 수박 등을 발굴했다”고 말했다. 달콤함 사수를 위한 치열한 전쟁이다.

[김미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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