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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남편 외도 추적 의뢰 들어와도, 한국의 셜록홈즈는 괴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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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탐정업 합법화 제대로 활동할까

조선일보

일러스트= 안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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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업이 합법화된 지난 5일, 세무서에 ‘명탐정 사무소’로 사업자 등록을 하고 영업을 시작한 김두현씨는 매일같이 들어오는 의뢰에 신이 났다가 곧 풀이 죽었다. 합법적으로 조사가 가능한 사건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많이 들어온 의뢰가 배우자의 외도 조사였지만, 변호사법이나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가능성이 있어서 거의 다 거절했다. 한 여성이 남편에게 혼외 자식이 있는 것 같다며 그 아이와 남편의 유전자 검사를 의뢰했지만, 이는 명백한 불법이기 때문에 바로 돌려보냈다. 한 여성이 “냠편이 내 차에 도청 장치를 설치한 것 같으니 찾아달라”고 부탁한 건은 문제가 없어 보여 수락했다. 김씨는 “합법적으로 탐정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발 빠르게 개업했는데, 현행법에선 탐정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고, 법적으로 아리송한 구석도 너무 많다. 차라리 국가에서 합법과 불법을 명확하게 구분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신용 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신용정보법)이 지난 5일 개정되면서 국내에서도 탐정 활동이 가능해졌다. 2018년 6월 헌법재판소가 탐정 명칭 사용 가능 결정을 한 데 이어 지난 2월 국회에서 이 법이 통과된 후 6개월 유예 기간을 거쳤다. 탐정업과 탐정 명칭 사용은 1977년 제정된 신용정보법에 따라 금지됐었다. 한국에도 '셜록 홈스'나 '명탐정 코난'처럼 경찰도 어려워하는 사건을 척척 해결하는 탐정이 등장하게 될까. 이대로라면 셜록 홈스의 후예가 나타나긴 어렵다.

한국에선 셜록 홈스가 나타날 수 없다?

대한민국은 OECD 가입 34국 중 탐정업을 허용하지 않은 유일한 국가였다가 신용정보법 개정으로 탐정이란 이름을 내걸고 영리 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 탐정 사무소를 차릴 수 있고, '탐정'이라고 간판이나 명함에 쓰거나 홍보도 가능하게 됐다. 탐정이란 단어를 쓰는 게 금지됐었다 뿐이지, 그 전에도 민간 조사원, 흥신소, 심부름 센터 등의 이름을 내건 민간 차원의 조사업은 존재했다. 이름만 바뀐 것뿐인데도 업계에서는 일단 이 변화를 환영하고 있다. 대한민간조사협회의 하금석 회장은 "음지에 있던 민간 조사업이 양지로 나오게 됐고, 사람들의 인식도 긍정적으로 변할 수 있는 계기가 생긴 것만으로도 대단한 변화"라고 했다. 협회는 탐정 사무소, 흥신소 등 민간 조사 업체가 전국에 3000여 곳 있을 것으로 추산한다. 탐정이 받는 보수는 경력이나 성과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시간당 10만원부터 30만원까지 받거나, 건당 300만~400만원을 받는 탐정도 있다. 성공 보수까지 포함해서 1000만원까지 받는 경우도 있고, 기업 의뢰는 억대로 넘어가기도 한다.

탐정업이 합법화되긴 했지만 국내 탐정이 셜록 홈스처럼 맹활약하긴 어렵다. 경찰청은 "일반적으로 탐정 업무로 여겨지는 민·형사사건의 증거 수집 활동이나, 잠적한 불법행위자나 가출한 성인 소재 파악 등은 여전히 제한된다"며 "탐정 업체에 의한 개인 정보 무단 수집·유출 내지 사생활 침해를 막기 위해 관련 업체에 대한 지도 점검 및 특별 단속을 실시한다"고 지난 4일 밝혔다. 이런 활동은 현행법상 변호사법이나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법 개정 전이나 후나 배우자의 외도를 조사해달라는 의뢰가 전체 업무의 70~80%를 차지하지만, 이것도 상황에 따라 처벌받을 수 있다. 수사·재판 중인 사건에 대한 정보 수집은 변호사법 위반이기 때문에 만약 이혼 소송이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 진행 중이라면 불법이 된다. 가출한 배우자를 찾아달라는 의뢰도 불법이 될 수 있다. 탐정이 가출한 사람을 찾았다고 하더라도 가출 당사자의 동의가 있어야만 그의 소재를 의뢰인에게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더서치민간조사의 최환욱 탐정은 "외도 증거를 잡아달라는 의뢰가 들어오면 나중에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도록 의뢰인과 함께 다니면서 의뢰인이 채증을 하도록 하기도 한다"고 했다.

▲부동산 등기부등본 등 공개된 정보의 대리 수집 ▲채용 대상이나 거래 상대의 동의를 전제로 이력서·계약서 기재 사실의 진위 확인 ▲도난·분실·은닉 자산의 소재 확인이 이번 탐정법 개정 전과 후에 모두 가능한 일이라면 이번 법 개정으로 새롭게 가능해진 것은 '가출한 아동이나 청소년 및 실종자 소재 확인'이다. 김두현씨는 "경찰 인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모든 실종 사건을 동시에 수사할 순 없다. 아이를 빨리 찾고 싶은 부모들이 탐정을 찾아온다"고 했다. 장재웅씨는 "최근에 가출한 딸을 찾아달란 의뢰를 호남 지역에서 받았는데, 조사해보니 딸이 사이비 종교 단체에 들어가서 부산에 있다가 서울로 옮겼더라. 이렇게 지역을 옮겨다니는 경우엔 경찰에 신고를 해도 빨리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탐정을 찾아온다"고 했다.

탐정이 양성화되면서 업계에서 노리는 새로운 분야는 기업 관련 업무다. 장재웅씨는 "회사 정보 유출, 즉 산업 스파이를 찾아달라는 요청이 지난해부터 꾸준히 늘어났다"며 "정황만 갖고는 사법 기관에서 수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그 증거를 포착한다"고 했다. 그는 최근 산업스파이로 의심되는 한 회사 직원이 경쟁 업체의 임원을 만나 자료를 넘기는 장면을 찍어서 의뢰인에게 넘겼다. 탐꾼탐정의 정치훈씨는 "은닉 재산을 찾거나 지식재산권 위반 사례를 찾아달라는 의뢰도 최근 많이 늘었다"고 했다. 그가 최근 맡은 사건이 부동산 사기를 치고 7년간 복역한 전과자가 빼돌린 재산을 찾는 것이다. 서류상으로 재산이 하나도 없는 것으로 나타나 피해 금액을 돌려받지 못한 사기 피해자들이 정씨를 찾았다.

"탐정도 국가의 관리·감독 필요"

탐정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요건은 별도로 없지만, 대부분 민간 자격을 발급받아 활동해왔다. 국내의 탐정 관련 자격증은 민간 자격만 있다. 민간 조사 자격 발급 기관으로 등록된 곳은 모두 27곳이지만, 경찰청에 따르면 이 중 실제로 자격증을 발급하는 곳은 네 군데다. 자격증이 없어도 되는데 발급을 받는 것은, 불법 영업을 하지 않으며, 민간 조사에 대한 기본 지식을 갖고 있다는 신뢰를 의뢰인에게 주기 위해서다. 한국특수직능교육재단 통계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탐정 관련 민간 자격증 중 하나인 PIA 민간 조사사 자격증을 547명이 취득했다. 이 중 70% 이상이 전·현직 경찰관 출신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자격증 없이도 아무나 사업자 등록만 하면 탐정 사무소를 열 수 있고, 민간 자격증이 있더라도 국가기관의 관리·감독을 받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탐정이란 이름을 걸고 불법 영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변호사 장모(38)씨는 "일부 민간 조사 업체는 위치 추적을 하기 위해서 차량에 위치 추적기를 붙이거나 주거지에 침입하고, 심지어는 휴대폰을 해킹하는 경우도 있다"며 "의뢰인이 협박당하거나 돈을 뜯기기도 한다"고 했다. 11일 한 탐정 사무소를 찾아간 강모(45)씨는 "얼마 전 흥신소에 남편의 외도 증거를 찾아달라고 부탁하며 선금 300만원을 냈는데 오히려 남편에게 의뢰 사실을 알리겠다며 더 많은 돈을 요구했다"며 "남편의 불륜보다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하기 위해 탐정 사무소에 왔다"고 했다.

법 개정 이후 ‘탐정’이란 이름을 달고 활동을 하는 이들은 앞으로 공인 탐정이 생기거나 국가기관에서 탐정을 관리·감독하는 것을 바란다고 입을 모았다. 자격을 갖추지 못하거나 불법행위를 하는 탐정 때문에 업계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하금석 회장은 “지금은 사업자 등록만 하면 누구나 탐정 사무소를 열 수 있다. 경찰청과 같은 국가기관에 등록이나 신고를 하는 방식으로 바꿔서 국가가 관리·감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최소한 금치산자나 전과자, 특히 성범죄자가 탐정업을 할 수 없게 하는 규정이라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변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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