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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아무튼 주말] “범죄자는 편안히 영어 공부 하는데, 피해자는 평생 고통받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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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범죄학박사 정년퇴임

동국대 경찰행정학부 이윤호 교수

조선일보

동국대 경찰행정학부 이윤호 교수는 지난 10일 인터뷰에서 “범죄에 대한 두려움이 지나치면 사회에 악영향을 끼친다”며 “한국은 안전한 나라이기 때문에 범죄에 큰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범죄학(犯罪學)’은 범죄가 발생하는 원인과 대책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전남편을 살해하고 토막 낸 고유정(36), 아파트에 불을 지르고 대피하는 주민을 찔러 죽인 안인득(43) 등 흉악범죄가 발생하면 범죄학에 대한 관심은 더 커진다. ‘그것이 알고 싶다’ 같은 범죄 프로그램은 큰 인기를 끌고, 범죄 전문가들이 던지는 메시지는 우리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동국대 경찰행정학부 이윤호(65) 교수는 1987년 한국인 최초로 범죄학 박사 학위(미국 미시간주립대)를 받았다. 미국 사회의 범죄를 분석한 범죄학 이론을 국내에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하지만 이달 말 정년퇴임을 맞는 그는 우리나라 범죄 연구에 대해 "가해자만을 위한 학문이고, 반쪽짜리"라고 혹평했다.

―반평생 연구한 학문인데 왜 반쪽짜리라고 보나.

"의정부 교도소는 외국어로 특화된 교도소다. 전국 교도소에서 외국어 시험을 치러 선발된 재소자들이 영어와 일본어를 공부하게 돼 있다. 여기에 뽑히면 강제노역에서 제외되고, 냉난방이 되는 강의실에서 종일 교육받을 수 있다. 그렇다 보니 '의정부 교도소 재소자 토익 성적이 서울대생보다 높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온다. 서울 소년원에는 창업 보육원이 있다. 그곳은 재소자들에게 창업 교육도 한다. 그런데 피해자 상황은 어떤가. 잔인한 성폭행으로 고통받은 '나영이(가명)'는 1억원에 가까운 치료비를 부담해야 했다. 나중에 대학병원의 배려로 해결되기는 했지만, 국가가 해준 것이라고는 없다. 가해자는 보호받고, 피해자는 평생 고통받고 살아가는 게 우리나라 현실이다. 이건 아니라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됐나.

"범죄 없는 세상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범죄에는 순기능도 있다. 범죄로 인해 도덕이 무엇인지 등을 알게 되고, 국민이 똘똘 뭉치는 계기도 된다. 지구 상에 어느 나라도 범죄 수를 감소시킨다는 목표를 달성한 적이 없다. 인구 증가율보다는 늘 범죄 증가율이 높았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나라 범죄 관련 연구나 정책은 범죄 수를 줄이는 데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가해자가 있으면 피해자도 있는데, 대부분 가해자를 어떻게 할지에 대한 논의만 했다. 피해자 인권이나 보호는 소홀했다. 반쪽짜리 연구에 그쳤다고 하는 이유다."

―피해자 인권과 보호를 강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범죄에 대한 두려움이 지나치면 혼자 살고 싶어도 못 살고, 택시도 타지 못하게 된다. 사회적으로도 큰 손해다. 그래서 두려움을 줄이고, 피해자 중심으로 연구나 대처가 이뤄져야 한다. 예를 들어 재난방송처럼 어디가 언제쯤 위험하니까 그런 곳은 가지 말라고 하든가, 갔을 때 행동 요령 등을 알려주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고유정과 같은 흉악범이 계속 나타나면 가해자에게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데.

"한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범죄에서 안전한 나라다. 인구 10만명당 살인범죄 건수(2018년)를 보면 미국은 5건, 프랑스는 1.2건, 독일은 0.9건인데, 우리나라는 0.6건에 불과하다. 범죄학을 전공한 외국 학자들을 서울로 초청하면 하나같이 '인구 1000만명이 사는 곳에서 새벽 1~2시까지 술을 마시고, 시내를 걸어 다녀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곳이 서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우리 국민은 범죄에 지나치게 두려움을 갖고 있다. 물론 흉악범도 많지만, 제주에서 벌어진 고유정 사건 때문에 서울에서 두려움에 떨 필요는 없다."

―왜 우리 국민은 범죄에 과도하게 두려워하는 것인가.

"1970~80년대 범죄자들에게 범행 수법을 어디서 배웠느냐고 물어보면 '수사반장'이라고 답한 사람이 많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범죄 관련 방송 프로그램이 범죄 수법이나 살해 현장, 유기 방법 등을 알려준다. 언론이 보도에 너무 많이 매달려 있다. 국민은 흥미 위주로 왜곡된 거울을 통해 범죄를 보게 된다. 미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시민 참여나 제보를 받는 프로그램은 필요하다. 하지만 온 동네에 죽일 놈만 있는 것처럼 비추는 것은 잘못이다."

―대한민국만이 가진 범죄의 특성이 있나.

"'묻지 마 범죄'다. 최근 일어난 서울 강남 일대 폭행사건, 여의도 칼부림 사건 등은 사회에 대한 증오심을 폭력으로 분출한 것이다. 다른 나라에도 묻지 마 범죄가 발생하지만 흑인이나 백인, 유대인처럼 인종 등이 범행의 표적이다. 우리나라 묻지 마 범죄는 특정한 표적이 없다. 어떤 집단에 속하지 않아도 범죄의 표적이 된다. 우리 사회가 점점 패자 부활이 어렵고 상대적 박탈감이 커지는 점이 영향을 준 것이다. 최근 부동산 값이 오르면서 커진 빈부격차도 묻지 마 범죄를 더 키울 수 있다고 본다."

―정년퇴임 후 계획은.

“사이버대 석좌교수로 범죄 관련 강의를 계속한다. 또 개인 연구소에서 범죄와 관련된 연구와 책을 써나갈 예정이다. 마음 같아서는 죽을 때까지 현역이고 싶다. 다만 지금 우리나라 학자들이 다루고 공부하는 범죄학은 1920~60년 미국 백인 주류가 만들어낸 이론이다. 100년이 지난 2020년 서울에 완벽히 적용하기는 어렵다. 범죄학을 우리나라에 소개하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면 한국 고유의 범죄학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후배 학자의 역할이라고 본다.”

[곽창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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