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연 TV조선 시사제작부 PD |
"PD님, 죄송한데요…." 후배가 끝을 흐리며 말을 꺼낸다. 가슴이 철렁한다. 이렇게 말을 시작하면 대부분 '그만둬야 한다'는 이별 선언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한꺼번에 두 명이나 이직 통보를 해 왔다. 방송은 숙련도가 생명인데, 인수인계할 시간도 없다니 치명타였다. 휴가철에, 게다가 경력자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 정말 죽을 맛이었다. 그런데 일이 의외의 곳에서 풀렸다. 얼마 전 타사 프로그램이 막을 내렸는데, 거기 인력이 일자리를 찾는단다. 급히 연락해 면접 보고, 계약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막막했던 상황이 풀리자, 또 "죽으란 법은 없다"며 기분이 좋아졌다.
방송을 제작하며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건 부지기수다. 과거 큰 시상식 날에 시상을 맡은 배우가 잠적한 일이 있었다. 드레스 대여에 메이크업까지, 새벽부터 준비해도 모자랄 판에 오후 시간에 다른 시상자를 찾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속칭 '생방송 펑크' 위기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생각보다 거물급 배우가 흔쾌히 "급하면 그럴 수 있지" 하며 달려와 줬다. 어디서 구했는지 멋진 드레스까지 입고서! 특별히 친한 사이도 아닌데 와락 껴안고 연신 고맙단 말을 외쳤다. 물론 앞서 다른 배우가 잠수 탔던 건 이미 까맣게 잊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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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박한 상황에선 더 절묘하게 '솟아날 구멍'이 생기기도 한다. 한번은 급작스러운 속보가 발생했다. 시간이 촉박해 아쉬운 대로 전화 연결 몇 개로 특보를 열었는데, 문제는 전문가 출연이었다. 타사는 특보를 계속하는데, 우리만 접을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전문가 대담이 반드시 있어야 했다. 제작진이 섭외 전쟁을 벌였지만, 대부분은 당장 오긴 힘들다는 대답이었다. 절망에 빠져 포기하려던 순간, 한 패널이 뜻밖의 정보를 알려줬다. 마침 전문가 몇 사람이 방송국 근처에서 식사 약속이 있단 것이다. 지체 없이 전화해 식사 중이던 분들을 모셨다. 불과 10여 분 만에 전문가로 꽉 찬 스튜디오를 바라보며, '몇 시간이라도 방송할 수 있겠다'는 들뜬 마음이 들었다.
제작진에게 '죽으란 법은 없다'는 말은 양날의 검이다. 극복하고는 있지만, 결국 죽을 만큼 힘든 순간이 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자나깨나 "오늘은 무사하길" 기도하는 마음을 조금은 알아주면 좋겠다.
[이수연 TV조선 시사제작부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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