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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자네의 글은 어두운 곳에서 빛이 되어준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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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바르트의 편지들

롤랑 바르트 지음|변광배·김중현 옮김 글항아리|704쪽|4만8000원

편지지 위로 펜촉이 내달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대서양 해변, 파리의 서재, 결핵을 치료받은 스위스의 병원…. 편지를 읽고 쓰는 장소의 빛과 공기, 냄새도 함께 스며 나온다. 프랑스의 기호학자이며 문학 이론가인 롤랑 바르트(1915~1980)가 당대 최고 지성들, 오랜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모았다. 젊은 시절 편지에는 ‘글쓰기의 영도’ 등 대표 저작을 형성해가는 지적 탐구 과정이 선명하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바르트의 책 ‘미슐레’에 대해 “상세함이 곧 깊이가 된다. 빛을 쏘아 존재의 심연을 파고든다”고 극찬한다. 서로 영향을 끼치며 창작하는 동지였던 알랭 로브그리예는 “자네만이 나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한다. 모리스 블랑쇼가 보낸 편지는 지적인 사랑 고백처럼 들린다. “아주 오래전부터 거의 끊임없이 자네를 생각하네. 자네의 글들이… 음울한 정신이 지배하는 어두운 곳에서 방향을 잃지 않게 해준다네.” 인간적 면모를 엿보는 즐거움도 있다. 스무 살 때 친구에게 쓴 편지에선 열여섯 살 소녀와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하며, 자신을 ‘성에 갇힌 공주를 구하러 평야를 가로질러 달려가는 젊은 기사’라 말한다. 청년 바르트의 허세에 웃음이 난다. 거인의 삶이 남긴 파편들이 사소해서 더 찬란하다. 프랑스에서 2015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나온 것을 별세 40주년인 올해 한국어판으로 펴냈다. 편지가 사라져가는 시대, 갈수록 드물어질 서간집이라 더 귀한 책이다. 양장본 외에 보급판(3만2000원)도 함께 냈다.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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