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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지긋지긋한 빗속에서 뉴올리언스의 햇살과 음식으로 잠시 위안을 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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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이용재의 필름위의만찬]

31. ‘러브 송 포 바비 롱’와 뉴올리언스 요리 세계

조선일보

엄마의 사망소식을 듣고 급히 집으로 돌아간 퍼슬레인. 장례식은 이미 끝난 후였고, 그녀를 맞이하는 것은 엄마의 친구라는 늙고 괴팍한 바비 롱과 글을 쓴다는 그의 제자 로슨이다. 셋은 엄마가 그들에게 공동 유산으로 남긴 집에서 원하지 않는 동거 생활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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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비가 무섭다. 무시로 일기예보를 확인하지만 적어도 오는 17일까지 해는 꿈도 꾸지 말라 한다. 습도는 가볍게 100%를 찍고 수해 소식이 연달아 들려 오니, 후텁지근한 가운데 속이 터진다. 기분 전환이 될까 싶어 햇살과 낭만이 넘치는 영화를 오랜만에 찾아 보았다. 스칼렛 조핸슨과 존 트라볼타가 함께 출연하는 ‘러브 송 포 바비 롱(바비 롱을 위한 연가(戀歌)·2004년)’이다. ‘사랑도 번역이 되나요’ 부터 ‘어벤저스’까지, 스칼렛 조핸슨은 설명이 필요 없는 배우이지만 모든 출연작이 블럭버스터는 아니다. 유명작들 틈새에서 아끼는 영화 두 편이 있으니 바로 ‘판타스틱 소녀 백서’(2000년)와 ‘바비 롱’이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미국 플로리다에서 남자친구와 동거하는 퍼슬레인(퍼시) 윌은 뒤늦게 어머니의 부고를 듣는다. 의절했는데 알 필요가 있느냐며 남자친구가 일부러 소식을 전하지 않은 탓이다. 부랴부랴 짐을 꾸려 뉴올리언스로 찾아가니 이미 장례식은 끝난 뒤였고, 어머니의 집에는 낯선 중년 백수 둘이 살고 있다. 전직 대학교수와 그의 제자라는 두 남자는 집의 소유권이 퍼시를 포함한 세 사람에게 공동 상속되었다는 유언을 전한다. 그렇게 어머니의 고향이자 어린 시절을 보냈던 뉴올리언스에 돌아온 퍼시는 두 남자와 내키지 않는 공동생활을 시작한다. 가수의 꿈을 위해 자신에게 소홀했던 어머니가 싫어 떠났던 퍼시는 기묘한 공동생활 속에서 조금씩 뉴올리언스에 정을 붙여 나간다.

미국하고도 남부이지만 뉴올리언스의 식문화는 프라이드치킨이나 와플을 자랑거리로 내세우지 않는다. 뉴올리언스와 이 도시가 있는 루이지애나 주 전체가 프랑스의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뉴올리언스는 프랑스 요리를 바탕으로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서아프리카나 카리브해 지역 식문화가 융합된 케이준(Cajun)이나 크리올(Creole) 등 자신들만의 요리 세계를 자랑한다. ‘앙두이’나 ‘부댕 누아르’ 같은 소시지, 하이라이스처럼 밥에 올려 먹는 걸쭉한 요리 ‘에투페’ 등 많은 음식이 프랑스 이름을 그대로 쓴다는 특징에서도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전통이 어우러져 뉴올리언스는 뉴욕, 샌프란시스코와 더불어 미국 내에서 최고의 미식 도시로 꼽힌다.

뉴올리언스에 속속들이 깃든 프랑스의 영향은 ‘마르디 그라(Mardi Gras)’에서 절정을 이룬다. 가톨릭에서는 부활절 전 40일 동안을 금욕 기간인 사순절로 정하는데, 시작일인 재의 수요일 전날인 화요일이 바로 마르디 그라이다. 프랑스어로 ‘기름진 화요일’이라는 의미에서 짐작할 수 있듯 마르디 그라는 성대한 행진과 음주가무로 이루어진 질펀한 축제이다. 미국 전역에서도 뉴올리언스에서 가장 대대적인 규모로 쇠는 마르디 그라의 핵심은 디저트인 ‘갈레트 드 루아(왕의 케이크)’이다. 버터를 많이 넣어 폭신폭신한 반죽에 크림치즈 등을 채우고 고리 모양으로 빚어 구운 뒤 무지개색의 가루 설탕을 뿌린 왕의 케이크는 사실 맛보다 당첨의 재미로 먹는다. 어린이용 자전거 바퀴만큼 큰 케이크의 어딘가에 어른 새끼손가락 절반 크기의 인형(주로 아기 모양)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다 같이 잘라 나눠 먹는 가운데 받은 조각에서 인형이 나오는 이가 왕 대접을 받고 다음 해의 마르디 그라 잔치를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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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가재(왼쪽)와 검보.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루이지애나는 프랑스 요리를 바탕으로 뛰어난 식문화를 발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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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음식에서는 ‘루(roux)’를 통해 프랑스 요리의 영향을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식용유나 버터 등 지방에 밀가루를 볶아 풀처럼 쑨 루는 수분을 흡수해 액체, 특히 소스나 요리의 국물에 걸쭉함을 불어넣는데 쓰인다. 말하자면 중국 요리의 마무리에 쓰이는 물녹말과 같은 원리 및 역할이다. 미국 전역에서도 오직 뉴올리언스를 포함한 루이지애나 주에서만 루를 쓰는 요리가 흔하다. 대표적인 경우가 루이지애나주의 공식 대표 요리인 검보(gumbo)이다. 식용유와 밀가루가 초콜릿에 가까운 갈색을 띨 때까지 오래 볶고 끓인 루에 닭육수를 붓고 소시지, 닭고기, 새우 등을 더해 걸쭉하고 진하게 끓여 밥에 얹어 먹는다.

햇살 쨍쨍한 여름이라면 뉴올리언스에서는 삶은 민물가재를 즐겨 먹는다. 퍼시의 늦은 고등학교 졸업을 축하하는 장면에도 등장하는 민물가재는 뉴올리언스의 대표적인 제철 잔치 음식이다. 갑각류에 뭐 먹을 게 있어 잔치 음식으로 삼는가 싶겠지만, 커다란 솥에 민물가재는 물론 옥수수, 감자, 양송이 버섯, 소시지 등등을 함께 넣어 익혀 실제로는 엄청나게 푸짐하다. 고추, 마늘, 후추, 파프리카 가루 등으로 이루어진 전통 양념을 써 미국 음식치고도 매콤함이 두드러지도록 삶아서는, 내용물만 건져 식탁에 수북히 쌓아 놓고 그릇도 접시도 없이 손으로 집어 먹는다. 한국에서는 다소 엉뚱하게도 가구 양판점 이케아의 식당에서 비슷한 가재를 먹을 수 있다.

양념을 푸짐하게 쓴 가재(와 옥수수, 소시지 등등)를 배불리 먹었다면 치커리 커피로 입을 가실 차례이다. 뉴올리언스에는 독특하게도 구운 치커리의 뿌리를 가루 내어 섞은 커피를 마신다. 1808년,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 탓에 커피 수입이 멈추면서 프랑스인들은 커피 부족에 시달린다. 프랑스가 원산지인 치커리의 뿌리가 커피와 비슷한 맛을 낸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조금씩 더해 커피의 양을 늘려가며 버텼다. 대륙봉쇄령이 해제되자 치커리도 설 자리를 잃었지만 명맥은 완전히 끊기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말하자면 궁여지책이 전통으로 뿌리 내린 셈인데 커피 만큼 맛있지도, 카페인을 함유하지도 않는다. 더치 커피와 약간 비슷하게 찬물에 12시간 동안 냉침해 낸 추출액으로 아이스 커피나 카페 라테 등을 만들어 마신다.

길디 긴 장마 속에서 기분 전환을 위해 오랜만에 꺼내 든 영화였는데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묘해졌다. 영화 전반에 넘실거리는 햇살이며 낭만 등 뉴올리언스의 모든 매력을 2005년의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한 번 휩쓸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영화 속의 뉴올리언스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지역의 80% 이상이 해수면보다 낮은 탓에 허리케인으로 붕괴된 호수 제방의 물이 빠지지 않아 뉴올리언즈의 피해는 극심했다. 영화의 절반쯤을 즐겁게 보다가 카트리나가 떠올랐고 이후 축사를 탈출해 도로를 달리는 전남 구례의 소떼 이미지가 겹쳐 보였다. 비도 양심이 있다면 이제 그만 내릴 때가 됐다.

[이용재 음식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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