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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20세기 냉전 종식의 설계자 영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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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렌트 스코크로프트 8월 6일 타계
키신저ㆍ브레진스키와 어깨 나란히
냉전질서 바꿔낸 뛰어난 외교전략가

한국일보

2009년 미국 워싱턴 국무부 청사에서 브렌트 스코크로프트(오른쪽)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로버트 게이츠 당시 국방장관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미 국방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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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계 유태인 헨리 키신저, 영국계인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그리고 폴란드계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등 세 사람은 냉전 질서가 바뀌던 20세기 말 미국의 외교전략가 3인방으로 꼽힌다.

키신저는 하버드대가 안방이었고 스코크로프트와 브레진스키는 뉴욕의 콜롬비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키신저는 적대국가와의 전선을 해체하는 복잡한 개입주의 방식으로 국가이익을 도모했고, 스코크로프트는 동맹국과의 협력을 확대하는 유연한 외교전을 주장했다. 브레진스키는 힘에 의한 단순한 강성외교를 펼쳤다.

이들 3인방은 리처드 닉슨을 시작으로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그리고 조지 W.H 부시 대통령까지 미국의 외교안보 분야를 주도했다. 키신저는 미국이 세계를 주도할 수 있는 전략적 기초와 방향을 만들었고, 스코크로프트는 전략의 구체적 사안을 짜서 실행에 옮겼고, 브레진스키는 전략을 진전시키는 힘을 제공했다.

키신저가 하버드대 인맥을 중심으로 전문가를 키워내 '키신저 사단'을 형성했다면, 브레진스키는 맨해튼의 자본가들이 조직한 '삼각위원회'를 주도하면서 자신의 노선에 전문가들의 시선을 모았다. 스코크로프트는 국제 정세와 동향에 대응하는 군사ㆍ외교분야 관료사회에 합리적인 논리를 제공하면서 행정부 내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개입주의의 키신저와 고립주의적인 브레진스키는 경쟁적인 긴장관계였다. 스코크로프트는 두 사람의 관계를 합리적으로 연결하고 유지시키는 역할을 했다. 나이가 가장 아래인 브레진스키는 2017년 89세의 나이로 타계했고, 그보다 5살 위인 키신저는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정책에도 가끔 훈수를 두고 있을 정도로 아직 그의 외교노선을 선보이는 현역이다.

키신저의 후계자 역할을 감당하면서 워싱턴 외교전문가 그룹에서 초당적인 어른 역할을 해 온 브렌트 스코크로프트가 지난 6일 워싱턴 인근 버지니아 자택에서 95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포드ㆍ부시 정부서 국가안보보좌관... 냉전 종식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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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0월 제럴드 포드(가운데) 당시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집무실에서 브렌트 스코크로프트(오른쪽)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과 대화하고 있다.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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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이상 미국의 외교정책에 몰두해온 스코크로프트가 타계했지만 워싱턴에서 그의 외교적 유산은 지속될 것이다." 뉴욕타임스(NYT)의 평가다.

키신저, 브레진스키와 달리 스코크로프트는 사실 군인 출신이다. 콜롬비아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그는 미 육군사관학교와 공군의 파일럿 훈련학교를 다녔다. 그는 공군 조종사가 되길 원했다. 파일럿이 되기 위한 훈련 중 비행기가 추락하는 경험을 한 뒤 군사전략가의 길을 택했다. 1947년 공군 소위로 임관해서 줄곧 국방부에서 군 전략을 담당하던 중 닉슨 대통령의 눈에 들었다.

그의 군사전략 보고서에 눈길을 준 닉슨은 1972년 2월 미국 대통령 최초로 중국을 방문하는 길에 그를 군사보좌관으로 데려갔다. 미중 간 첫 군사회담을 성공시킨 공로로 그는 장군으로 진급했고 1975년 키신저의 뒤를 이어 포드 대통령 때 국가안보보좌관에 올랐다. 닉슨 정부 때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역임했던 키신저는 포드 대통령 아래선 국무장관을 맡았다. 스코크로프트는 키신저와 함께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이 발을 빼는 작전을 설계하고 지휘했다.

그는 민주당의 카터 대통령이 당선되자 국가안보회의(NSC)를 떠났지만 카터 대통령의 군축자문위원회를 이끌었다. 특히 1979년 카터 대통령과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간 전략무기협정에 영향을 미쳤다. 이 협정은 비준되지는 않았지만 미사일의 핵탄두 수를 제한하는 최초의 핵 협정으로서 향후 핵미사일 확산을 방지하는 국제사회 규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스코크로프트는 1989년 조지 H.W 부시 대통령 때 다시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임명됐다. 베이징 천안문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대통령 특사로 베이징을 방문해 덩샤오핑(鄧小平)을 만났다. CNN방송은 당시 천안문 시위대를 강제 진압한 중국 고위층들과 와인잔을 들고 건배하는 스코크로프트를 연일 비난하기도 했다. 그는 1991년 걸프전을 기획하고 실행했다. 걸프전을 승리로 이끈 공로로 '대통령 자유의 메달'을 받았다.

스코크로프트는 부시 대통령의 외교전략 책사로서 소련의 고르바초프를 상대로 냉전을 종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베를린 장벽 철거, 소련 붕괴, 동유럽 민주화, 걸프전 승리 등 역사의 대전환을 이루는 큰 사건들을 미국 주도로 관리했다. 한국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정책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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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4월 미국 워싱턴 백악관 집무실에서 조지 H.W. 부시(오른쪽) 당시 대통령이 딕 체니(가운데) 국방장관,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다. 조지 H.W. 부시 기념도서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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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부시 대통령 땐 이라크전 반대... 네오콘과 대립


2008년 미국 대선 당시 버락 오바마와 치열하게 경쟁한 힐러리 클린턴은 2003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전쟁에 동의한 것을 두고 곤욕을 치렀다. 네오콘들이 저지른 '잘못된 전쟁'으로 판명되면서 클린턴에겐 지금까지도 전쟁에 동의한 과오가 악령처럼 따라다닌다.

당시 스코크로프트는 부시 대통령이 네오콘들의 극성에 떠밀려 전쟁을 개시하는 과정에서 반대했던 공화당 내 몇 안 되는 인사 중 가장 거물급이었다. 당시 네오콘의 수장이었던 풀 울포위츠에게 전쟁을 부추기지 말라고 역정을 냈던 일화는 유명하다. 오바마 전 대통령이 2008년 대선 후보 때 발표한 '담대한 희망'에서 공화당계인 스코크로프트를 긍정적으로 언급한 것이 큰 뉴스가 되기도 했다.

오바마의 참모로서 유엔대사와 국가안보보좌관을 역임한 수전 라이스는 당시 오바마 후보가 민주당쪽 전략가들보다 스코크로프트 계열의 안보 전문가들을 더 선호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2009년 1월에 취임한 오바마 대통령은 조지 W 부시 대통령 때 중앙정보국(CIA) 국장과 국방장관을 역임한 로버트 게이츠를 국방장관에 연임시켰다. 게이츠는 부시 대통령 때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역임한 콘돌리사 라이스와 함께 스코크로프트의 수제자로 꼽힌다.

2006년 네오콘들의 극성스러움을 대변해온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물러나고 게이츠 장관이 취임했을 당시 NSC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이었던 마이클 그린은 한국 특파원들에게 "신임 게이츠 장관은 스코크로프트 인맥이어서 한국 같은 동맹국들에게 마치 고객을 대하듯 성의를 다할 것"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2017년 1월. 트럼프 정부의 외교전략을 우려해 200여명의 외교안보 전문가들이 모였을 때 가장 원로급인 스코크로프트는 국가를 정당의 우위에 두고 트럼프 정부를 적극 도우라고 권고했다. 2016년 대선 당시 콜린 파월과 함께 공화당계 외교안보 전문가 100명 이상을 묶어 트럼프 대신 클린턴 지지 선언을 주도했던 그였다. 하지만 당파와 무관하게 새 정부를 도와야 한다는 뜻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선 후 이들에게 거의 욕설에 가까운 조롱을 퍼부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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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렌트 스코크로프트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2009년 10월 16일 국무부 청사에서 연설하고 있다. 미 국방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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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그 전 주한 미 대사도 스코크로프트계 인사


1973년 CIA 한국 지국장으로 부임한 이래 직간접적으로 한국 현대사와 인연이 깊은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 대사는 스코크로프트 휘하에서 그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 중 하나다. 스코크로프트의 타계 소식에 그레그 전 대사가 떠오르는 이유다. 스코크로프트와 거의 동년배인 그레그 전 대사도 90세가 훌쩍 넘었다. 그레그 전 대사는 두 차례 김대중 전 대통령 구명에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노태우 정부의 주한미군 전술핵 철수, 팀스피리트 한미 군사훈련 중단을 결정하는 데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실무 현장에서 미국의 전략을 수행하면서도 인간의 보편적 가치와 인류애적 시각이 국가적 임무의 상위에 속한다는 신념과 의지를 갖춘 외교관이었다. 스코크로프트의 철학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그레그 전 대사는 은퇴 후 뉴욕 근교에 머물고 있다.

나는 뉴욕에서 그와 가깝게 사귈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 말기에 혹독한 학창 시절을 보낸 나에겐 CIA 한국 지국장,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백악관 NSC 아시아담당관, 그리고 노태우 정부 때 주한 미 대사를 역임한 그가 증오와 분노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를 개인적으로 알고 난 후 미 정부 고위관료 중에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그만큼 좋은 사람이 있을까 싶은 마음으로 바뀌었다.

그는 한국의 민주주의와 대북 포용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온 자유주의자다. 은퇴 후 북한을 자주 방문하면서 미국에서 북한의 입장을 옹호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는 이명박 정부 당시 그레그 전 대사가 회장으로 있던 뉴욕의 코리아소사이어티가 큰 어려움을 겪은 이유였다.

스코크로프트계 인사인 그레그는 자신의 나라 미국을 사랑하고 국익을 중시하는 애국자이지만, 그에게 미국의 국익은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라는 인류애적 가치를 기반에 두는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 부시 대통령을 따랐으나, 아들 부시 대통령 때엔 네오콘들과 크게 부딪혀 대통령을 가까이 할 수 없었다. 스코크래프트와 같은 경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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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석 미주한인유권자연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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